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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림(이화여대 섬유예술전공4)씨는 올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창업했다. 의류 브랜드를 학기 중에 론칭한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러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가 운영하는 학생설계학기제 덕분. 별도의 강의를 듣지 않아도 학생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학점으로 인정해준다. 노씨는 “학교에 제출한 계획대로 프로젝트를 수행해 3학점을 받았다”고 했다.
학생설계학기제에서는 학부생이 기획한 프로젝트가 학점으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제도가 대학가에 등장한지는 5년. 한동대와 이화여대가 2015년 각각 자유학기제와 도전학기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후 건국대, 세종대, 아주대 등으로 확산했다. 대학가에서는 시행 이후 학생의 진로 탐색과 창업이 활성화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에 교육부가 정책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일 정도다. 이르면 내년 이뤄질 지원 사업을 앞두고 학생설계학기제를 살펴봤다. -
◇ 기존 교육과정에 없는 새로운 시도인지 고려
학생설계학기제의 탄생에는 학사제도가 경직돼 있다는 대학가의 자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학사제도 안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어렵다는 판단이다. 강경란 아주대 대학교육혁신원장은 “세상이 바뀌는데 학교도 발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봤다”며 “기존의 교육과정에서 할 수 없는 시도를 해보자는 게 도입 취지”라고 했다.
대학별로 명칭은 다르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원종필 건국대 교무처장은 “학생이 설계한 프로젝트가 정규 교육과정을 대체한다”고 설명했다. 계획한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하면 프로젝트는 학점으로 인정받는다. 학점 인정의 폭은 넓은 편이다. 아주대와 이화여대는 한 학기를 포괄하는 18학점까지 허용한다. 한동대는 아예 학기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참여하고 싶다면 학기말 이뤄지는 모집에서 프로젝트 계획안을 제출해 심사를 통과하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 주제’. 대학은 학생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지 고려한다. 일례로 건국대는 참신성을 드림학기제의 심사기준으로 둬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는지, 교육과정 밖이거나 교육과정보다 심화한 새로운 활동인지 또는 다른 프로그램과 차별성이 있는지를 본다. 아주대 파란학기제 선정 주요 기준에도 기존 교육과정과의 차별성이 꼽힌다. 세종대의 창의학기제도 주제의 창의성을 강조한다.
대학에 따라서는 참여시 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 한동대는 등록금의 80%나 현장실습지원금을 장학금으로 제공한다. 이화여대는 프로젝트 시작 전 200만원의 장학금을 먼저 지급하고, 프로젝트 결과에 따라 최대 200만원을 별도로 준다. 아주대는 학점당 10만원, 건국대는 3학점당 10만원을 지급한다. 지금까지 별도의 재정 지원을 하지 않았던 세종대도 다음 학기부터는 지원금을 운영할 계획이다.
학교는 주차보고서, 중간보고서, 결과보고서 등을 제출하며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확인한다. 참여 대상은 대개 3학기 이상 학교를 다닌 학생이며, 대학별 참여인원은 신청인원에 따라 달라진다. 건국대 교무처 담당자는 “학기마다 30명에서 80명 정도로 차이가 크다”고 밝혔다. 아주대 대학교육혁신원 관계자 또한 “매학기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80명”이라고 했다.
◇ 창업, 논문 등 다양한 성과에 교육부 정책화 시도
2학기 학생설계학기제를 신청한 김은숙(세종대 컴퓨터공학과4)씨는 “학기 중에 시간을 활용하고 학점도 받아가니, 평상시에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부담 없이 실천으로 옮길 수 있다”며 “수업시간에는 할 수 없었던 장기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프로젝트 결과물의 형식은 다양하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품을 만들거나, 논문이나 특허를 내놓는 학생도 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관심사를 깊게 탐구하다보니, 일부 학생은 자신의 적성을 찾기도 한다. 정다훈(건국대 생물공학과4)씨는 “효모의 미백 기능을 검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며 “연구가 적성에 맞다고 느껴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는 중”이라고 했다. “팀원 중 일부는 화장품 사업으로 발전시켜 창업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제도를 활용하면 창업 준비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평도 있다. 맛집 정보를 제공하는 어플리케이션으로 창업한 정의훈(건국대 경영학과4)씨는 “과거 창업 관련 사업에서 줄줄이 탈락했다”며 “그러나 학생설계학기제 지도교수님들께 피드백을 받아 사업안을 발전시키고 나서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술보증기금 창업예비패키지로 창업 초기 자금을 조달하고, 창업 경진대회에서도 입상했다. 창업 활성화 효과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학생설계학기제에 지난해 참여한 660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설문조사한 결과, 졸업 후 진로로 창업을 원한다고 답한 학생은 14.6%(44명)였다. 전체 대학생 중 창업을 희망하는 비율인 3.2%(교육부 2017년 대학진로교육현황)의 네 배를 웃돈다.
이에 교육당국은 학생설계학기제를 정책화하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홍숙기 교육부 교육일자리총괄과 연구사는 “올해 대학진로체험학점제라는 정책으로 예산을 편성했다”며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안이 통과하면 2020년부터 정책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나온 안에 따르면 일반대학 10개교와 전문대학 10곳을 선도학교로 지정하고, 학생들에게 최대 10학점까지 학점당 1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한다.
◇ 달라진 교수 역할 적응, 학점 형평성 유지는 과제
하지만 학생설계학기제 경험자들은 보완해야할 부분도 있다고 느낀다. 특히 학생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주체라는 것을 교수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경우, 교수가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진은 ‘대학의 진로체험학기제 운영 사례 및 정책화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지도교수가 제도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워크숍을 개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담당자들은 참여 분야도 확대해야 할 것으로 봤다. 앞선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참여학생은 공학계열이 46.5%로 가장 많았다. 인문, 사회, 예체능 등 다른 계열의 참여 비율은 10%대에 머물렀다. 세종대 창의학기제 담당자는 “지금까지는 IT 기술을 활용하거나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게 결과물의 60% 이상을 차지했다”며 “이러한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이번 학기부터는 창의학기제의 참여 유형을 다양화하고, 인문·사회계열 학생에게도 문턱을 낮추려 했다”고 말했다.
기존에 운영하던 정규 교육과정과 형평성을 맞추는 것도 과제로 여겨진다. 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때 학생설계학기제와 기존 교육과정에서 얻는 학점이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학교 관계자들이 학점 인정에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이태하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학장은 “한 학기 놀면서 학점을 따는 제도라는 오명이 생기지 않도록 매주 점검을 꼼꼼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점 인정이 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학생설계학기제를 취재하며 만난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한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김태산(아주대 미디어학과4)씨는 “우리학교 규칙에 따르면 9학점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당 24시간에서 30시간을 투자하면 된다”며 “하지만 프로젝트를 실제로 진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주당 80시간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점 인정에 보수적이면 학생도 시간을 많이 투자하기를 꺼려할 겁니다. 도전 과제도 주어진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적당한 것으로 설정할 테고요. 학생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한편, 정책화를 앞두고 자율성이 강점인 제도를 교육부가 규제로 옭아맬 우려도 나온다. 강 원장은 “다른 사업처럼 창업 실적이나 취업률 등 양적지표로 사업 여부를 결정한다면, 대학이나 학생 개개인이 실험해볼 수 있는 폭이 좁아질 것”이라며 “학교가 지표에 매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제도를 운영하도록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고픈 활동이 그대로 학점으로 … 新 학사제도 ‘학생설계학기제’
-현행 학사제도 딱딱하다는 대학 자성에서 탄생
-학점 받으면서 하고픈 일 하니 창업 도전 늘어
-교육부도 정책화 ‘눈독’ … 대학가는 “신중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