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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신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학교가 '외고 가려면 방과후학교 다녀야 한다'고 하는데, 선택의 여지가 어디 있겠어요."
서울 강북 A중학교 학부모 유모(44)씨는 지난달 며칠을 고민한 끝에 중3 딸이 2년간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학기 초 면담에서 담임교사가 "방과후학교 수강 기록은 학생부에 남는다"며 "특목고는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하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담임교사는 "방과후학교 들어야 중간고사에 유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요즘 유씨는 한 달 전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아이가 "수업의 질(質)이 떨어진다"고 보채는 탓이다. 유씨는 "다시 학원에 보내려 해도 학교에선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달라'고만 한다"며 "학생 선택권이 없던 8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했다.
정부가 사교육 경감 대책으로 '방과후학교' 수업 지원을 강화하고 나서, 일부 학교에선 "강제 보충수업이 부활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본지가 서울시내 학교들의 가정통신문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일선 학교들은 '내신 유리' '입학사정관제 대비' '학생부 기재' 등의 문구를 써가며 사설 학원이 즐겨 쓰던 '반(半) 협박' 마케팅까지 흉내 내고 있었다. -
◆경쟁력이 아니라 강제력으로 수업 듣게 해
서울 양천구 B중학교 3학년 K양은 지난 2주간 저녁 9시까지 '방과후학교' 수업을 듣다가 최근에 그만뒀다. 2년 동안 줄곧 전교 3등 안에 들었던 K양에게 수업 수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K양이 반강제적으로 방과후학교 수업을 듣게 됐다는 점이다. K양은 "개학하자마자 교장선생님과 담임교사, 학생부장, 학년부장 등으로부터 '방과후학교 수업을 들어라'는 권유를 수차례 받았다"고 했다. 교사들은 주저하는 K양을 "상위권을 위해 외부 강사도 영입했는데 너 같은 학생이 안 들으면 안 된다" "과학고 가려면 학교장 추천이 필요한 것 알지 않느냐"며 설득했다. K양은 "학교장 추천 때문에 억지로 신청했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됐다"고 했다.
서울 성북구 C중학교는 지난달 초 가정통신문을 통해 40명 정원의 '종합내신반'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가정통신문에는 "이수과정 학생부에 기록" "내신 관리를 통한 상급학교 진학 준비"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사실상 "종합내신반을 들어야 진학에 유리하다"는 의미였다.
수강료도 적지 않았다. '종합내신반'의 두 달 수강료는 37만8000원. 저녁을 각자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제 드는 비용은 사설학원 수강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 학교 학부모 김모(47)씨는 "학부모 총회에서 교사들이 '특목고 진학에 중요하다'며 수강을 강권했다"고 했다.
특목고 진학이나 내신 성적과 연계해 '방과후학교 마케팅'을 하는 것은 C중학교뿐만이 아니다. '자사고 내신반영 비율 증가'(성북구 D중), '입학사정관제 대비 수상 및 학생부 기재'(강남 E중) 등 서울시내 상당수 학교가 가정통신문에 대동소이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담임교사에게 수강인원 할당하기도
괴로운 것은 학생만이 아니다. 일부 학교는 교사들에게 "학급당 10명은 신청해야 한다"는 식으로 수강인원을 할당하기도 한다.
서울 F중학교 1학년 담임교사 최모(35)씨는 "방과후학교 신청이 정해진 목표에 못 미치자 학교장이 '담임 업무를 제대로 하느냐'고 질책했다"며 "내년 담임 배정을 생각하면 앞으론 아이들을 닦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선 학교장과 교사들은 "교육 정책이 사교육비 절감 위주로 추진되는 게 아쉽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서울 G중학교 교장은 "중요한 것은 정규 수업인데 이 부분을 놓친 느낌"이라고 했다. 면목고 송형호 교사(영어)는 "학습부진아는 공부하는 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동기(動機) 부족 때문인데, '양 늘리기'에만 치중하는 방과후학교 정책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한국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정부가 무조건 돈을 내려 보내니 학교평가라는 부담을 안고 있는 학교들은 '보여주기' 경쟁에만 급급한 실정"이라며 "학교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신 유리"… 수강 강요하는 방과후학교
오현석 기자
socia@chosun.com
"이수과정 학생부에 기재" "입학사정관제 대비" 등
'半협박성 가정통신문' 보내
목표달성 미진한 교사엔 "담임 제대로 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