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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려대 이과대에 입학한 A(19)씨는 기말고사가 막 끝난 이번 주부터 강남의 재수(再修) 전문학원에 다니고 있다. A씨는 "우리 반(班) 학생 30명 중 4명은 아예 입학 직후부터 반수(半修)를 선언하고 준비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교수님들이 격려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말리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 합격 뒤 또다시 입시 공부에 뛰어드는 '반수'가 이젠 보편적 현상으로 굳어졌다. 서울 한 사립대의 B 교수는 "신입생 중 20% 정도는 반수를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학생들이 당장 휴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1학년 1학기 수업은 으레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말했다.
◆정시모집은 '재수생 루트'
수능 최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서울대 경영대는 올해 신입생 중 정시모집으로 선발된 50명 중에서 26명(52%)이 재수생 출신이었다. 57명 모집에 21명(36.8%)이었던 지난해에 비해 재수생 비중이 급증한 것이다〈표〉. -
수시모집에서 재학생이 대다수인 것과 비교해 보면 점차 '정시는 재수생, 수시는 재학생'의 입학 루트가 굳어져가는 양상이다. 서울대 의예과에서도 지난해 정시모집으로 들어온 신입생 26명 중 재수생은 8명(30.8%)이었으나, 올해는 27명 중 11명(40.7%)으로 늘어났다.
서울대의 한 인기학과의 C 교수는 "우리 과 신입생 출신학교 1위는 연세대, 2위는 강남 모 유명학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서울 상위권 대학의 인기 학과들도 비슷하다. 성균관대 경영학과는 올해 신입생 228명 중 87명(38.2%)이 재수생이었다. 정시 모집만 따지면 118명 중 55명(46.6%)에 달한다. 연·고대에서는 의대와 경영학과, 사회과학대 등에서 재수생이 강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취업 약한 '문·사·철'의 타격
반수생으로 인한 '학생 공동화(空洞化)' 현상에선 대학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일어나고 있다. 수도권 상위권 대학에선 실제로 학업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나머지 대학들에선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
반수생인 연세대 문과대 학생 D씨(19)는 "반수에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한 스펙(학점 등 외형적 조건) 관리도 중요하기 때문에 1학기 내내 수업을 빠지지 않고 충실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문과대의 E 교수는 "반수생들은 워낙 티 나지 않게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2학기에 휴학을 하고 나서야 '아, 그 친구가 여태까지…'라며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반면 서울 중위권 대학의 F 교수는 "학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강의실에 빈자리가 늘어난다"며 "1학년 1학기 수업에선 리포트를 내지 않거나 시험에 들어오지 않고 대충 때우려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학적(學籍)만 걸어놓을 뿐 사실상 그 대학에서의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 사립대의 G 교수는 "반수를 한 번 실패하고 나서도 2학년 때 '2.5수'에 도전하는 학생들도 종종 눈에 띈다"고 했다.
학생 유출의 위기감은 취업에 약하다고 지목되는 학과일수록 더 크다. 부산 사립대의 H 교수는 "문사철(文史哲) 학과 교수들은 '큰일 났다. 손님이 없으면 결국 학과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라며 걱정한다"고 말했다. 서울 중위권 대학의 어문계열 학과 I 교수는 "학기 초 신입생을 상담할 때 반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럴 때 참 슬프지만 붙잡을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했다.
◆중하위권 대학은 등록금 수입 감소
반수생 증가는 등록금 수입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중하위권·지방 대학들에 경영 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반수에 따른 학생 유출→학생을 메우기 위한 편입생 선발 증가→지방대 공동화 현상→중국 등 외국인 유학생 유치로 메우기의 도미노 현상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학들은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서울 한 사립대의 교직원 J씨는 "최근 들어 많은 대학이 1학년 1학기에는 휴학을 하지 못하도록 교칙을 바꿨다"고 말했다. 이 학교의 경우 병원에 입원하거나 입대 영장이 나오지 않는 이상 입학하자마자 휴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반수에 뜻을 굳힌 학생들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내신 때문에 서울대에 가기 어려운 외고 등 성적이 좋은 고교 출신 학생들일수록 반수에 대한 의지가 클 것"이라고 지적한다. 수도권 68개 일반 대학의 휴학생은 2001년 19만1215명(28.6%)에서 지난해 22만5416명(30%)으로 늘어났다.
[再修공화국] 빈자리 많은 1학년 강의실… "분위기 어수선"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再修공화국] [中] 대학교육 공동화(空洞化)
"신입생 중 20% 정도가 半修택한 서울 사립大도"
정원 채우려 편입생 선발 지방대까지 도미노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