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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서울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개찰구 앞에 한 어린이가 휠체어에 앉아 지하철 노선도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오늘 운전할 곳이야. 드디어 해볼 수 있겠네. 어진아, 좋지?”
“네. 좋아요.”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오늘 ‘위시데이’의 주인공인 김어진 군(경기 고양 성라초 5년). 시민의 발을 책임질 ‘지하철 기관사’를 꿈꾸는 어린이다. -
◆다리 근육 약해지는 병… ‘철도 놀이’로 꿈 찾다
어진이가 지하철을 좋아하게 된 건 초등 2학년 때. 다리 근육이 점점 약해지면서 두 발 대신 휠체어에 의지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바깥나들이가 녹록지 않았던 어진이의 유일한 놀이터는 마루였다. 아버지 김병욱 씨(44세)는 “움직이는 게 불편하다 보니 어진이가 할 수 있는 놀이라곤 기껏해야 게임 정도였다”며 “그래도 아이와 함께 할 만한 취미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철도 모형을 수집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재미로 시작된 부자(父子)의 철도 모형 수집은 어느새 일과가 됐다. 모형 가격이 제법 비쌌지만 하나 둘 모으다 보니 3년 만에 20세트까지 늘어났다. 철도 모형 한 세트는 기차 외에 차량기지·기차역·선로·산·터널 등이 모두 포함된, ‘실제 철도의 축소판’이다. 선로 사이 자갈까지 놓여 있을 정도로 세밀한 게 특징. 단순히 기차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변 지형까지 맘대로 배치할 수 있는 철도 모형의 매력에 어진이는 푹 빠졌다. 놀이로 시작된 관심은 자연스레 철도에 대한 공부로 이어졌다.
매주 일요일 어진이의 집 마루에선 어김없이 ‘철도 놀이’가 시작된다. 모형을 설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남짓. 이 시간만큼은 어진이도, 아버지 김씨도 진지하다. 매번 다른 형태의 배치를 고민, 또 고민해 선로를 깔고 열차를 작동시킨다. 철도를 차지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어진이가 철도 모형 중 가장 좋아하는 열차다. 어진이는 “유럽 기차도 멋있지만 다양한 형태와 독특한 멋을 가진 지하철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수많은 기차를 제쳐놓고 어진이가 지하철 기관사를 꿈꾸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
◆“기관사 꿈 꼭 이뤄 부모님 태워 드릴 거예요”
오후 3시 10분, ‘기관사 김어진’이란 명찰이 달린 제복 차림의 어진이가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운행을 함께할 백성준 기관사와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진이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지하철이 서서히 움직이자 어진이는 탄성을 질렀다.
‘일일 기관사’가 된 어진이의 첫 임무는 서울도시철도공사와의 무전 연락. 어진이는 제법 의젓하게 안전 운행을 다짐하는 보고를 끝냈다. 동행한 이기찬 서울도시철도 승무관리P/L(파트장)은 “지하철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고 무전도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 보니 곧바로 운행을 시작해도 되겠다”며 웃었다.
이날 어진이가 운행한 코스는 어린이대공원역에서부터 차량기지가 있는 장암역까지. 중간 지점인 중화역에서부턴 백 기관사의 도움을 받아 2인 1조로 운전했다. 지하철이 역에 정차할 때마다 어진이에겐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어진아, 빨간 버튼을 꾹 누르면 문이 닫히는 거야. 앞에 보이는 거울로 고객들이 안전하게 내리고 타는지 확인한 뒤 눌러야 돼. 알았지?”
백 기관사의 설명에 따라 열차 문을 안전하게 여닫는 건 고스란히 어진이의 몫이었다. 어머니 신정혜 씨(40세)는 “어진이가 운전하는 지하철을 타니 정말 뿌듯하다”며 “이젠 제법 기관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40분간의 짧은 운행을 마친 후 어진이는 장암역 차량기지로 향했다. 지하철 정비 시설과 통제실을 둘러보는 것으로 이날 어진이의 ‘꿈 같은 하루’가 끝났다. 이기찬 P/L은 “오늘 지켜보니 어진이는 서울도시철도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것 같다”며 “빨리 커서 서울도시철도 기관사로 입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디오 게임으로나 접했던 지하철 운전을 직접 해볼 수 있어 무척 기뻤어요. 마지막엔 기관사 아저씨가 배려해주셔서 제 힘으로만 운전대를 잡기도 했죠. 다음엔 제 손으로 지하철 체험 행사를 신청해 꼭 다시 와 볼래요. 오늘을 계기로 기관사의 꿈이 더욱 굳어졌어요. 감사합니다. 얼른 건강해져서 부모님께 제 손으로 운전하는 지하철을 타게 해드릴 거예요.”
[소원을 말해봐] 지하철 기관사 꿈 이룬 김어진 군
김재현 기자
kjh10511@chosun.com
'멋진 제복 입고 지하철 운전…꿈 아니겠죠?"
집에서도 철도 모형 조립하며 꿈 키워
"꼭 건강해져 부모님 태워 드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