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위인전] 안숙선 명창
류현아 기자 haryu@chosun.com
기사입력 2010.11.30 09:45

"손에서 피 나도록 연습 또 연습"

  • 소년조선일보는 새 기획 ‘살아 있는 위인전’을 오늘부터 매주 화요일자 3면에 연재합니다. 책 속에 갇힌 옛날 위인이 아닌,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금 이 순간’ 각 분야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이들의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생생한 감동과 교훈을 드릴 겁니다. 첫 회의 주인공은 안숙선 명창(名唱·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사람, 61세)입니다. 지난 24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만난 안 명창의 인생을 그의 입을 빌려 소개합니다.

    ▲‘가야금 명인’ 이모와 함께 살다

    1949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읍내에서 장사를 하셔서 할머니와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살았어요. 우리가 어릴 땐 애들도 다 집안일을 거들었어요. 제가 5남매 중 둘째였는데 아기를 봐주다가 잘 못 봤다고 숙모한테 혼나기도 했지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이모와 함께 살았어요. 어머니가 읍내에서 이모님이랑 같이 사셨거든요. 이모는 가야금뿐 아니라 소리와 춤도 잘하셨어요. 이모의 잔심부름은 모두 제 차지였어요. 어깨 주물러 드리기, 허리 밟아드리기, 군것질거리 준비하기…. 방 청소도 하고 가야금도 닦았어요.

  • 안숙선 명창은 어릴 때부터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여린 손가락에 피가 맺혀도 깜깜한 여관방에서도 가야금 연습을 빼먹지 않았다. 스승들은 그런 ‘착실한 꼬마 명창’을 언제나 아끼고 예뻐했다. /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kmin@chosun.com
    ▲ 안숙선 명창은 어릴 때부터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여린 손가락에 피가 맺혀도 깜깜한 여관방에서도 가야금 연습을 빼먹지 않았다. 스승들은 그런 ‘착실한 꼬마 명창’을 언제나 아끼고 예뻐했다. /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kmin@chosun.com
    ▲아홉 살 때 가야금 시작

    아홉 살의 어느 날, 이모가 가야금을 시작하자고 하셨어요. 학교에 다녀오면 그때부터 죽 연습시간이었어요. 학교 수업 시간에도 ‘땅땅’ 책상 밑에서 가야금 튕기는 연습을 했지요. 줄을 확실히 외워놔야 다음날 잘하잖아요. 악보도 없었을 때라 다 외워질 때까지 무조건 연습, 또 연습이었어요. 아직 어릴 때였으니까 조금만 연습하면 손에서 피가 나곤 했어요.

    그땐 ‘하기 싫다’는 것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이거 좋다’는 생각도 없었지요. 그저 어른이 시키니까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꼭 들어야 하고, 안 그러면 못된 아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이모에게 가야금을 배우다가 남원국악원에 나가 비로소 소리를 배우게 됐어요.

    ▲공부·합창… 못하는 게 없던 아이

  • 어릴 때 성격은 무척 내성적이었어요. 말수도 적은 편이었지요. 당시 성적표에도 ‘내성적이고 책임감이 아주 강하다’고 쓰여 있답니다. 공부를 곧 잘해서 상을 많이 받았어요. 부반장도 여러 번 했고요.

    노래도 잘해 합창단 활동을 했어요. 처음엔 소프라노였는데 소리 연습을 하다 보니 점점 소리가 낮아지더군요. 결국 앨토로 바뀌었어요. 속이 상해 그만둬버렸지요(웃음).

    ▲홀어머니 도우려 전국 돌며 공연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열한 살 때였나…. 그때부터 ‘소리 잘해서 어머니를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소리에 매달렸어요. 공연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어요.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닌 곳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그런 절 무척 가슴 아파하셨어요. 하지만 한 번도 어머니를 위해 소리 한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어요.

    당시는 공연료 대신 야식비가 나왔어요. 전 그걸 한 푼도 안 쓰고 저금통에 넣어뒀어요. 그렇게 모은 돈을 어머니께 편지와 함께 보내곤 했지요. 어머니도 차마 그 돈을 못 쓰시고 장롱 속 깊숙이 넣어놓으셨대요.

    매번 공연을 다니다 보니 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공연 한번 다녀오면 수업 진도는 이미 저만치 나가 있었지요. 한번은 친구들과 선생님이 집에 찾아와선 어머니께 “숙선이는 공부를 잘하니까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전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속으로 다짐했어요. ‘용돈이라도 벌어 엄마를 도와드려야 한다!’고요.

    ▲19세 때 상경… 별명은 ‘연습벌레’

  • 제 어릴 적 별명은 ‘아기 명창’이었어요. 어른들이 절 무척 예뻐하셨어요. 공부에 열의가 있고 집념도 있다고요. 틈만 나면 다른 친구들에게 “숙선이 본 좀 받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공연이 있는 날은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하지만 전 깜깜한 방 안에서 혼자 가야금을 꺼내놓곤 꼭 연습을 해보고 잤어요. 쉬는 날이면 다른 애들은 서커스 공연을 보러 나갔지만 전 그때도 어른들께 공부를 배웠지요.

    열아홉 살 되던 해 만정 김소희 선생님을 만나 서울로 올라왔어요.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후엔 판소리 공부에 정성을 쏟았지요. 당시 제 별명이 ‘연습벌레’, ‘녹음기’였어요. 공부 욕심이 많아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온 종일 소리를 해댔답니다.

    연습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선생님께 한 시간 배우면 연습은 수천·수만 번씩 반복해야 해요.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도를 닦는 것처럼 뭔가를 얻게 되는 거지요.

    ▲“신념을 갖고 진심을 다해 사세요”

  • 제 생활신조요? 별다를 게 없어요. 검소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자는 거예요. 최소한 지금까진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내 일 열심히 하면서요.

    요즘은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이 우리 소릴 좋아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어요. 우리 소리는 그냥 음악이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신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결과물이거든요.

    전 늘 제자들에게 음악 하는 이유를 되새기라고 강조해요. 확고한 신념 없이 하는 음악은 그저 세월 낭비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아니까요. 자신이 하는 일은 그게 뭐든 목숨 걸고 사랑하라는 말도 하지요. 어린이 여러분도 무슨 일을 하든 진심을 다해 열심히 하세요. 그래야 스스로 기쁠 수 있으니까요. 성공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따라온답니다.

    >>안숙선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아홉 살 때부터 소리와 가야금, 춤을 익혔다. 열아홉 살에 서울로 올라와 김소희·박귀희 명창 문하(門下·가르침을 받는 스승의 아래)에서 공부했으며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1987년 KBS 국악대상, 1998년 프랑스 문화부 예술문화훈장, 1999년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