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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기금(基金)’이란 말 들어본 적 있나요? 기금은 뜻이 있는 개인이나 회사, 혹은 단체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돈을 모아놓는 큰 저금통 같은 거예요.
아름다운재단에도 다양한 기금이 있어요. ‘발리네 기금’처럼 가족의 이름을 딴 기금도 있고 ‘류무종 기부문화도서관 기금’처럼 기부자와 기부 목적을 붙인 기금도 있죠. ‘혼자만잘살믄무슨재민겨 기금’, ‘멸치한상자 기금’, ‘키다리아저씨 기금’ 등 재미있는 이름의 기금도 있답니다.
10년 전 아름다운재단이 생길 때 처음 만들어진 기금은 ‘김군자 할머니 기금’이에요. 오늘은 여러분에게 이 기금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얘길 해볼까 합니다. -
◆“돈 없어 공부 못하는 일 없도록”… 전 재산 5000만원 기부
김군자 할머니는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나셨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할머니네 집은 너무나 가난해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됐죠. 더욱 슬픈 건 할머니가 어렸을 때 3년씩이나 일본군에 위안부(전쟁 때 군대에서 남자들을 성적(性的)으로 위안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된 여성)로 끌려갔다는 사실이에요. 할머니에겐 그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죠. 아직도 할머니는 그때를 생각하시면서 눈물짓곤 한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온 할머니를 손가락질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어요. 배움이 짧았던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어요. 남의 집 식모살이, 단추 끼우기 같은 허드렛일이 전부였죠. 할머니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외롭게 이런 일들을 하며 어렵게 사셨어요. 하지만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으셨답니다.
10년 전,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재단 사무실에 찾아오셨어요. 거금 5000만원을 고이 품고서 말이죠. 그 돈은 할머니가 평생 어렵게 모아온 전재산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게 평생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이 좋은 시대에도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다더군요. 이 돈이 그런 아이들에게 쓰였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남기신 말은 이 세 마디가 전부였어요. -
◆할머니의 가르침…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그날 이후 ‘김군자 할머니 기금’은 고아 출신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답니다. 할머니 덕분에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했던 언니·오빠들이 화가, 디자이너, 엔지니어로 힘찬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어요.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아이들은 종종 “고마운 할머니께”로 시작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내오곤 한답니다. 할머니는 이 편지들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요. 손자뻘 대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것 같아 더없이 기쁘다고 하시면서요.
지난 2007년,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돼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됐어요. 전국 곳곳에서 ‘김군자 할머니 기금’ 장학생들이 모여들었죠. 할머니는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오히려 씩씩한 모습으로 미소를 보이셨어요. 짠한 광경이었답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수술실로 올라가던 할머니의 담당 간호조무사 허모 군이 바로 ‘김군자 할머니 기금’ 장학생이었던 거예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허군은 할머니의 병실을 매일같이 찾아 정성스럽게 간호했대요. 허군도, 할머니도 연방 서로를 향해 “고맙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김군자 할머니 기금’엔 할머니가 기부하신 돈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의 뜻에 동참한 수많은 기부자, 훌륭하게 자라준 장학생의 정성도 함께하고 있어요. 그 덕분일까요? 훈훈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김군자 할머니 기금’도 꽃처럼, 나무처럼 쑥쑥 자란답니다.
성경에 “부자의 큰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그리스의 옛 화폐 단위)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군자 할머니의 나눔 역시 세상의 어떤 기부보다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고 늘 말씀하세요. 풍족하게 살면서도 나눌 게 없다고 투덜대는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는 말이 아닐까요? -
[나눔으로 쑥쑥] "돈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전해주세요"
김군자 할머니의 특별한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