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게임은 10대가 가장 선호하는 여가활동으로 꼽힌다. 지난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10대는 전체의 89%에 이른다. 학교와 학원을 돌며 밤늦게야 집에 오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딱히 즐길 만한 취미생활이 없다. 이들이 ‘컴퓨터만 켜면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게임에 쉽게 빠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7월 여성가족부가 전국 초등학교 4학년생과 중학교 1학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이용습관 진단 전수조사’ 결과 인터넷과 게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조사 대상의 5.5%인 6만8000명이었다. 반별 인원을 30명으로 봤을 때 적어도 한두 명은 중독자인 셈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제 인터넷과 게임에 중독된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지적한다. 3회에 걸쳐 인터넷·게임 중독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짚어본다. -
오후 3시 30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온 ‘ㄹ’ 군(중 3)은 숨돌릴 틈도 없이 거실 컴퓨터로 향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컴퓨터 작동음이 들리는 걸 확인한 ‘ㄹ’ 군은 그제야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을 벗기 시작했다. 컴퓨터 부팅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다.
온라인 게임을 시작한 ‘ㄹ’ 군은 저녁 6시쯤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꼼짝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몇 번씩 계속되자 마지못해 식탁에 앉았다. 건성건성 식사를 끝낸 ‘ㄹ’ 군은 채 삼키지도 않은 밥을 우물거리며 다시 컴퓨터로 향했다. 다시 두 시간 후, ‘ㄹ’ 군과 어머니의 신경전이 시작됐다.
“이제 게임 그만해!”
“말 시키지 마! 바쁘다고!”
한바탕 실랑이를 하던 ‘ㄹ’ 군은 “에이 씨” 하곤 컴퓨터를 끄더니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목적지는 동네 PC방. 친구들과 PC방에 모여 신나게 게임을 즐기던 ‘ㄹ’ 군은 청소년 출입시간이 끝난 저녁 10시가 돼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방과 후부터 잠들 때까지 게임 생각
지난 7월 한국청소년상담원이 진행하는 인터넷·게임 중독 치료 프로그램 ‘레스큐 스쿨’에 참가하기 전까지 ‘ㄹ’ 군의 하루 일과다. ‘ㄹ’ 군은 “학교에서도 늘 게임 생각밖에 안 나 수업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ㄹ’ 군에게 시험 기간은 오히려 행복한 시간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 게임을 더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ㄹ’ 군이 게임에 빠지기 시작한 건 초등 5학년 때부터였다. 전학 와 막 친구를 사귈 무렵, 한 친구가 “아이디 빌려줄 테니 이 게임 한번 해볼래?” 하고 제안했고 별생각 없이 응한 게 시작이었다. 게임을 즐기며 ‘ㄹ’ 군은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다. 유난히 게임 적응력이 뛰어났던 것. ‘ㄹ’ 군의 레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학교에 가면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이 아는 척해올 정도였다. 게임 실력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며 ‘ㄹ’ 군은 점점 더 게임에 빠져들었다. 하루 한두 시간 정도였던 게임이 나중엔 ‘ㄹ’ 군의 온종일을 차지했다.
‘ㄹ’ 군의 어머니 ‘ㅇ’ 씨는 게임하는 아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학생이라고 왕따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이가 게임을 잘해 친구들에게 인기 얻는 걸 보고 오히려 신이 났어요.” 문제가 드러난 건 1년 후였다. 중상위권이었던 ‘ㄹ’ 군의 성적이 평균 50점 이하로 뚝 떨어진 것. 어머니는 물론, ‘ㄹ’ 군 본인도 깜짝 놀랐다.
‘ㄹ’ 군은 당분간 게임을 끊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게임을 시작했고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자신이 게임하는 걸 막는 사람은 모두 적(敵)으로 보였다. “평소엔 얘기도 잘하고 활발했던 아이가 게임만 시작하면 헐크로 변했어요. 게임 시간을 조절해야겠다 싶어 못하게 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쾅 닫는 등 폭력적이 되더라고요.”(어머니 ‘ㅇ’ 씨)
◆중상위권이던 성적 1년 만에 30점대로
중학교에 들어와 친구들과 PC방에 드나들기 시작하며 ‘ㄹ’ 군은 공부를 아예 접었다. 지난 1학기 ‘ㄹ’ 군의 평균 성적은 30점. 10점 맞은 과목도 수두룩했다. 고교 입학을 코앞에 둔 ‘ㄹ’ 군은 덜컥 겁이 났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맘을 다잡고 게임을 끊어보려 했지만 이미 게임이 머릿속에 가득해 빠져나갈 생각을 안 했어요.” ‘ㄹ’ 군은 울며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수소문 끝에 소개받은 게 ‘레스큐 스쿨’ 프로그램이었다.
요즘 ‘ㄹ’ 군은 게임을 완전히 끊었다. 치료 후 몇 번 게임에 접속해 봤지만 더이상 재미도 없고 머리만 아팠다. “게임에 빠져 있던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ㄹ’ 군은 “지금 보면 화면에서 움직이는 그래픽 조각일 뿐인데 왜 거기에 몇 년씩이나 투자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ㄹ’ 군은 요즘 밀린 공부를 따라잡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게임만 하던 때보다 훨씬 즐겁다”고 했다. 예전엔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귀찮았던 그는 요즘 시간이 나면 자전거를 타거나 친구들과 축구·배드민턴을 즐긴다.
◆“우리 반 다섯 명 중 한 명은 게임 중독”
‘ㄹ’ 군의 경우는 자신이 게임 중독임을 인정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해 효과적 치료가 가능했다. 이윤희 한국청소년상담원 선생님은 “인터넷·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중독인 걸 인정하지 않고 부모도 쉬쉬해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지곤 한다”고 지적했다.
‘ㄹ’ 군은 “게임 중독은 혼자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특히 린이·청소년 게임 중독자가 5.5%라는 사 결과에 대해 ‘ㄹ’ 군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우리 반 애들 다섯 명 중 한 명은 게임 중독일 거예요. 개들은 자신이 중독이라는 것도, 게임이 위험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해요.”
[특별기획] 나도 혹시 게임 중독? ① 게임에 빠진 'ㄹ'군의 하루
조찬호 기자
chjoh@chosun.com
호기심에서 시작···온종일 게임, 게임 생각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