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좇는 인터뷰] 13살 '수석디자이너' 김주한 군
포천=류현아 기자 haryu@chosun.com
기사입력 2010.08.25 09:44

소년의 디자인, 어른들을 놀라게 하다
학교도 포기… 그림만 그리던 아이, 유명 백화점도 주한이 작품 모셔가

  • 한준호 기자 gokorea21@chosun.com
    ▲ 한준호 기자 gokorea21@chosun.com
    23일 오전 경기도 포천에서 만난 주한이가 명함을 내밀었어. ‘디자이너 김주한’ 이라고 쓰여 있더라. 아직 얼굴에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소년과 명함…. 사실 좀 어색했어. 하지만 거실 한쪽에 진열된 작품들을 보자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어. 주한이가 디자인한 화장품 용기와 포장들이 꽤 근사했거든. 실제로 이 제품들은 국내 유명백화점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어. 놀랍지?

    △첫 타석에서 만루홈런 날리다

    주한이는 1997년생이야. 만 13세지. 친구들은 요즘 2학기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주한이 머릿속엔 오로지 디자인 생각뿐이야. 주한이는 3년 전 디자이너가 됐어. 만 10세의 디자이너는 우리나라, 아니 전세계 최연소 기록일 걸. 물론 처음엔 사무실에 변변한 책상 하나 없었어.  아무리 엄마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라지만 능력을 제대로 보여줘야 하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취미 활동이 아니라 전문 직업인의 세계니까 말이야.

    사무실에 주한이 책상이 생기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한 2~3개월? 회사에서 처음 출시하는 고급 미용비누의 종이갑 디자인을 근사하게 해낸 덕분이었지. 토마토 성분이 들어간 비누엔 싱싱하고 먹음직한 토마토를 그렸고, 녹차 성분이 들어간 비누엔 햇살을 가득 담은 건강한 찻잎을 그려넣었어. 그림에 어울리는 글자체를 정하는 일, 그림과 글씨를 배열하는  일도 직접 맡고 말야.

    결과는 대성공이었어. 그 콧대 높다는 백화점에서 먼저 입점을 권유했을 정도니 더 말 안 해도 알겠지? 이 디자인으로 주한이는 지난해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는 ‘GD(Good Design·우수디자인)’ 마크도 받았어. 첫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날린 셈이지.

    △고집불통 소년, 오로지 그림만 그리다

    사실 오늘의 ‘디자이너 김주한’ 뒤엔 말못할 부모님의 맘고생이 있었어. 다른 것엔 도통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림만 그려대는 아들이 있다고 생각해봐. 게다가 방바닥·벽면 등 눈에 보이는 곳은 죄다 주한이의 도화지였으니…. 엄마는 늘 걸레를 들고 주한이 뒤를 쫓아다니기 바빴지. 도화지를 사줘도 몇 시간이면 다 써버려서 나중엔 A4용지를 박스째 사다주셨대.

    더 기막힌 일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일어났어. 주한이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렸거든. 부모님은 많은 생각 끝에 주한이의 뜻에 따랐어.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존중해주신 거야. 하지만 주한이를 미술학원에 보내진 않으셨대. 대신 주한이가 마음껏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집을 옮겼고, 전시회를 세 번이나 열어 자신감을 높여주셨어.

    △ "유학 안 가고도 잘할 수 있어요"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주한이는 산책하러 나가. 조용히 길을 걸으며 나무와 풀, 곤충들을 관찰하다 보면 답답했던 머리와 가슴이 뻥 뚫리거든. 카메라에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물을 담는 일도 좋아해. 디자인 소재로 아주 유용하거든.

    사람들은 종종 주한이더러 유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 아무래도 디자인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한 수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주한이의 생각은 좀 달라. 유학을 떠난 사람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 나라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잖아? 주한이는 그게 싫대. 유학을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거든. 주한이의 포부는 ‘나라에 보탬이 되는 디자이너’ 래.

    △좋아하는 일 더 잘하려 공부 다시 시작

    또래처럼 학교생활을 하지 못한 탓에 주한이에겐 친구가 별로 없어. 가끔 그게 아쉽긴 하지만 외롭진 않아. 주한이에겐 멋진 강아지 친구가 여섯 마리나 있거든.

    사실 그동안 주한이에게 공부는 관심 밖이었어. 좋아하는 그림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조금씩 공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어.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기본적인 소양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래서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어. 영어 공부도 열심이고 말이야.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려는 주한이의 욕심, 멋지지 않니?

    주한이의 '꿈 키우는 비법'

    1단계: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기
    2단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
    3단계: 부모님을 내 편으로 만들기
    4단계: 혼자 힘으로 문제 해결하는 능력 기르기
    5단계: 새로운 기회는 무조건 잡기

    '꼬마 디자이너' 주한이가 '국내 대표' 산업디자이너 정우형에게 묻다

  • 진정한 디자인은 '손' 아닌 '생각'에서 나와

    —디자인을 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착한 마음요. 다른 사람을 위하는 배려가 없으면 쓰레기를 자꾸 만들게 됩니다. 디자이너는 자기 고집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물건을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흔히 디자인을 가리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 이라고들 하는데요.

    “전혀 새로운 건 없어요. 다만 자연 속에서, 또는 일상 경험 속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걸 발견하는 순간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하는 거죠.”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디자인일까요?

    “19세기까지만 해도 동양의 디자인이 서양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었어요. 외국 디자인을 무조건 좇는 건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과 똑같아요. 동양적인 디자인, 우리만의 디자인, 한국인으로서 즐겁고 편하고 안전한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는 대신 회사와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어요. 다른 공부도 필요할까요?

    “진정한 디자인은 ‘손’ 이 아니라 ‘생각’ 에서 나옵니다. 잘 그리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많은 걸 보고 느껴야 합니다. 다만 한번 본 건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죠. 책도 많이 읽으세요. 특히 역사 공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네요.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생각 없는 디자인’ 밖에 안 나와요. 자신의 뿌리를 아는 건 그래서 중요하죠.”

    정우형 대표(다담디자인)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금성사 디자인 종합연구소(오늘날의 LG전자)에서 7년간 제품 디자이너로 일했다. 1992년 디자인 전문 기업 다담디자인을 설립했다. 내비게이션·MP3·청소기·이어폰·카메라·공기청정기 등 가전·IT 제품 디자인이 주요 분야. 샤프전자·필립스·지멘스·3M 등 세계적인 외국 기업의 제품 디자인을 담당해왔다. 2009년 휴대용 초음파 진단기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제품디자인 부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