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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홈쇼핑 감사팀의 유찬우(37) 과장은 주말이면 네 식구의 식사를 책임진다. 아내가 전업주부인데도 굳이 앞치마를 두르는 이유는 세 가지. 군대시절 생긴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용, 그리고 아이들과의 스킨십을 위해서다. "어떤 책에서 봤는데 아빠가 해준 음식을 먹은 아이들은 절대 비뚤어지지 않는대요.(웃음)"
유씨 역시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전형적인 한국 남성이다. 게다가 일 중독이었다. "아내와 소소한 말다툼이 잦아지고 뭣보다 아이들이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외로웠죠." 해법을 먼저 제시한 쪽은 아내였다. 남편의 생일선물로 두란노 아버지학교의 수강증을 끊어온 것.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가족과 일상을 더 많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평일은 불가능하니 주말에라도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줘야겠다고 다짐했지요." -
◆한국 30대 아빠들도 "친구 같은 아버지"가 이상형
우리 사회에도 '친구 같은 아빠'들이 늘고 있다. 인터넷에는 요리하는 아빠 블로거가 인기를 끌고, 늦은 밤 아내와 아이들 손을 잡고 장을 보는 남성들도 흔히 만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혜영 연구위원이 '남성의 부성 경험과 갈등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지난 7~8월 전국 900가구(아버지 900명, 어머니 900명, 20세 미만 자녀 500명)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방문면접)에 따르면 한국의 30대 젊은 남성들은 서구의 '프렌디'들과 마찬가지로 '친구같이 자상하며 양육지향적인 아버지'를 이상적인 아버지로 여겼다. '바람직한 부성(父性)'을 묻는 질문에 39세 이하 아빠들의 31.4%가 '친구같이 지낼 수 있는 아버지'라고 응답했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아버지'(26.6%)와 '가정적으로 자상한 아버지'(24.3%)란 대답이 비등했다.
이들은 출산 준비부터 적극 참여했다. 39세 이하 아빠들의 43.8%가 '임신 출산에 관한 정보검색'으로 아내의 출산을 도왔다고 응답했고, '출산준비물 구입'에는 30.8%가, 정기적으로 병원에 동행한 경우도 7.1%나 됐다. '특별히 한 일이 없다'가 50%에 이르는 45세 이상 아버지들과는 대조적이다.
◆경제 불안정, 과도한 직장 스트레스가 걸림돌
하지만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친구 같은 아버지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들다"고 고백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과도한 헌신과 몰입을 요구하는 직장문화다. 최근에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이를 한층 강화시켰다.
실제로 설문에 응한 아버지들은 '좋은 아버지가 되는 데 걸림돌'을 경제적 불안정(40%), 직장에서의 과도한 스트레스(19.4%), 장시간의 근로시간(17.7%)이라고 답했다. 김혜영 연구위원은 "900명의 아버지 중 40%가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었다"면서 "경제적 부양자로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딜레마에서 고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아버지의 소득이 높거나 교육수준이 높다고 해서 '프렌디'가 될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김 연구위원은 "사회적으로 강도 높은 업무를 요구 받고 치열한 경쟁 상황에 놓여 있는 남성들은 분만 과정에도 참여하지 못할 만큼 최소한의 부성조차 제약받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남성들의 가족 친화적인 행동패턴을 칭찬하거나 격려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프렌디'가 되려는 아빠들을 주눅 들게 한다. 호주 교포로 1년 전 가족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김모(37)씨는 요즘 우울감에 시달린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아내 대신 22개월 된 딸을 키우는 자신을 동네 주민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 아파트 놀이터에서 할머니들이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하며 혀를 차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호주에선 놀이터 데려가는 게 아빠 몫이거든요. 내가 정말 이상한 남자인가, 하는 생각에 한없이 우울합니다."
회사원 박모(41)씨도 지난 여름휴가 때 8개월 된 딸을 아기띠에 맨 채 보건소로 예방접종을 갔다가 어색해하는 간호사들 때문에 부끄러웠다고 했다.
◆아버지 권위 세우려면 일상을 공유하라
그 때문일까. 많은 남성들이 가정적인 아빠가 돼야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데는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 연구위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혼 남성들이 자녀 양육에 있어 아내와 동등한 책임을 느낀다고 답한 부분은 '자녀양육에 대한 고민'(71.8%), '놀아주기'(60.8%), '동화책 읽어주기'(50.4%)뿐이었다. 반면 '기저귀 갈아주기'(60.6%), '밥 먹이기'(66.7%), '재우기'(58.5%), '목욕시키기'(52%)처럼 구체적이고 고된 노동은 맞벌이 여부를 떠나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라고 응답했다.
'배우자 출산휴가제'나 '육아휴직제'의 사용도 여의치 못하다. 배우자 출산휴가제를 이용한 기혼남성은 전체의 12.4%, 육아휴직제를 이용한 남성은 6.8%에 불과했다.
김혜영 연구위원은 "아버지의 인생 자체가 산 지식이었던 과거와 달리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저절로 오지 않는다"면서 "자녀들과 일상을 공유하고 스킨십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세우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21세기 아빠들이 사는 법-프렌디] "아빠가 요리해 주면 아이가 밝게 자란대요"
<3·끝> 한국 아빠들은
한국 30대 아빠 10명 중 6명 "프렌디 되고싶어"
장시간 근로·남자답지 못하다는 시선이 걸림돌
출산휴가·육아휴직제 등 기업이 적극 권장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