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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길’ 하면 뭐가 떠오르니? 북적북적한 등굣길? 구멍가게가 있는 좁은 골목길? 아니면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뻥 뚫린 고속도로? 지원이(충남 천안 오성초등 4년)는 길을 보면 창문이 떠오른대.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나? 지원이는 ‘길’이란 창을 통해 세상과 얘길 나눠. 그리고 그 결과를 하얀 캔버스 위에 남기곤 하지.
◆휴게소 갈 때마다 관광지도 챙기기
부모님은 지원이가 어릴 때부터 여행을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 여행길엔 꼭 휴게소에 들르게 되잖아. 간식도 먹고 잠깐 휴식도 취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때마다 지원이는 휴게소에 놓여 있는 주변 지역 관광지도를 챙기곤 했어. 그렇게 모은 지도가 지금은 공부방 책상 서랍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아졌지. 지구본과 세계지도는 없느냐고? 에이, 그건 기본이지.
지원이는 시간 날 때마다 수집한 지도를 한 장씩 찬찬히 살펴봐. 그러다 보면 얽히고설킨 도로가 머릿속에 명쾌하게 자리를 잡지. 그런 다음, 유난히 마음에 드는 도로를 찾아내. 그걸 연필로 스케치하고 물감까지 칠하면 ‘지원이표 길’이 탄생하는 거야. -
◆미술 전공 부모님도 놀란 색 감각
아이들의 그림은 대부분 비슷해. 동물이나 사람, 집 같은 걸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지원이는 달랐어. 지원이 그림 속 주인공은 오로지 ‘길’이었거든.
스케치북에 연필로 길을 그리곤 하던 어느 날, 아빠가 색칠도 한번 해보라고 말씀하셨어.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등이 어우러진 알록달록한 그림이 완성됐지. 미술을 전공한 엄마·아빠 눈에도 색의 조화가 참 예뻐 보였어.
처음에 부모님은 반신반의(半信半疑·얼마쯤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의심함)하셨어. ‘어쩌다 보니 색을 잘 맞춘 거겠지’라고 생각하신 거지. 하지만 지원이의 색감(色感·색에 대한 감각)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어. 결국 부모님은 지원이가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작은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사주셨어. 스케치북에만 남기기엔 지원이의 그림이 아깝다고 생각하신 거야.
◆“초대전까지 치른 어엿한 화가예요”
이듬해 봄, 부모님은 지원이의 작품을 서울오픈아트페어(SOFA)에 보냈어.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공모전이었지. 미술 대학 재학생을 비롯해 2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린 이 행사에서 지원이의 작품이 상을 받았어. 최연소 입상이었지. 주최 측은 나중에서야 지원이가 열 살 꼬마란 걸 알고 무척 놀랐다고 해. 놀라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어.
공모전 입상 후 지원이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그림의 완성도는 조금씩 높아졌어. 그리고 지난해 겨울, 한 갤러리의 제안으로 올 6월 초대전을 치렀어. 초대전이란 갤러리에서 모든 비용을 대는 전시회를 뜻해. 전문 작가들도 갤러리의 초대를 받긴 쉽지 않지.
‘편지원의 길 그림전(展)’이란 이름으로 엿새간 열린 전시회에 지원이는 최소 8호부터 최대 50호에 이르는 아크릴화 12점과 드로잉(drawing·채색하지 않고 선으로 이뤄진 미술작품) 수십 점을 내놓았어. 6개월 동안 매일 적게는 1시간에서 많게는 4시간씩 캔버스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내놓은 땀의 결과물들이었단다.
◆“부모님 도움 안 받았니?” “전혀요”
첫 번째 초대전에서 지원이의 작품은 여섯 점이나 팔려나갔어. 물론 아는 분이 사주신 것도 있지만 전혀 모르는 분이 사간 그림도 많대. SOFA 특별전에 내놓은 그림 두 점도 모두 팔렸지. 지난달부턴 경기도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한 점이 팔렸다고 해. 그림 값은 한 점당 수십만원까지 가기도 한다니 이만 하면 어엿한 ‘인기 작가’지?
사람들은 가끔 지원이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미술을 전공한 부모님의 손길이 작품에 더해진 게 아니냐는 거지. 지원이의 대답은 항상 간단해. “아닌데요?” 그리곤 웃는대. 부모님 도움 어쩌고 얘기하는 것부터가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말해주는 거니까 내심 기분이 좋은 거지. 미술대학 교수인 아빠 또한 “부모만 간섭하지 않으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시곤 해.
얼마 전부터 지원이는 자연 재해(災害)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조금씩 그림의 주제를 넓혀나가고 있는 거지. 물론 지원이 특유의 색감은 여전해. 내후년쯤엔 두 번째 개인전도 열 생각이라는구나.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진 그림을 볼 수 있겠지?
김종학 교수가 어린이 화가 지원이에게
"전시·음악회 등 문화로 감성 키우세요" -
-한 번도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학원 교육엔 장단점이 있습니다. 미술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돕는 거예요.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예술의전당 같은 공공기관의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왜 화가가 되셨어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잘하는 게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중학교 1학년 끝날 무렵부터 화실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다행히도 부모님이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죠.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녀가, 특히 아들이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무척 반대하셨거든요.”
-화가가 된 걸 후회해본 적은 없나요?
“화가는 항상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작업이 잘 나오면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반대로 전시회 날짜는 다가오는데 작업이 잘 안될 땐 ‘내가 왜 이걸 시작했나’ 싶어 괴롭죠. 특히 화가는 외로운 직업이에요. 혼자서 모든 걸 다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니까요. 큰 전시회를 앞두고선 일 년 내내 혼자 지낼 때도 있어요. 그럴 땐 패션 디자이너나 영화감독처럼 여러 사람과 의논하며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부럽기도 해요.”
-그림에 도움이 되는 활동엔 어떤 게 있을까요?
“늘 문화를 가까이하는 환경이 중요해요. 틈날 때마다 전시회나 음악회장을 찾으세요. 책을 통해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미술은 어디까지나 학문적으로보다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게 좋습니다.”
>>김종학 교수는
제1·2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 제5·7회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을 수상했다. 1989~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국내는 물론 미국·일본 등에서 15회에 이르는 개인전(초대전)을 가졌다. 젊은 미술인들의 축제인 ‘2010 아시아프’ 총감독을 지냈다. 현재 세종대학교 예체능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꿈을 좇는 인터뷰] 길 그림으로 서울아트페어 입상한 편지원 군 <충남 천안 오성초등 4년>
의왕=류현아 기자
haryu@chosun.com
"이젠 더 넓은 세상을 그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