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_공부에 치인 어린이들] '단과 5과목' 하루 네 시간씩 학원가 맴돈다
김재현 기자 kjh10511@chosun.com
기사입력 2010.10.18 10:01

1.초등 6년 기찬이의 하루
2. 전문가 진단과 해결방안
학교 끝나면 엄마가 교문 앞 대기
차 안에서 식사 때우고 학원으로

  • “부모님이 힘들게 돈 벌어서 너희들 학원 보내주는데 열심히 공부해야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야.”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 초등생 대상 학원 선생님이 수업 때마다 하는 얘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을 바로잡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학원에 다니는 초등 6년 김모 양이 전해준 얘기다.



  • 서울의 한 학원에서 국제중을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학원수업을 듣고 있다(위),학원수업을 듣기 위해 가는 강기찬 군. 옆 친구들이 어깨에 짊어진 가방의 무게는 상당해 보였다.
    ▲ 서울의 한 학원에서 국제중을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학원수업을 듣고 있다(위),학원수업을 듣기 위해 가는 강기찬 군. 옆 친구들이 어깨에 짊어진 가방의 무게는 상당해 보였다.
    요즘 초등학생은 고달프다. 덩달아 부모도 고달프다. 초등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사이에선 “요즘 받는 스트레스가 ‘고3 학부모 스트레스’ 못잖다”는 얘기가 나온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벌써부터 ‘입시 준비’에 매달리는 어린이들에게 집은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곳’이다. 국제중 준비생 등 상당수 어린이의 공부량은 중3이나 고3 수험생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때마침 이달부터 ‘초등 입시’에 한몫 하고 있는 2011학년도 국제중 전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소년조선일보는 공부에 치여 사는 요즘 초등생의 현실을 밀착 취재하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아나섰다. 그 결과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서울 A초등 6년 강기찬 군(가명)의 하루는 학교 수업이 끝나는 오후 2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지막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기찬이는 가방에 교과서를 얼른 집어넣고 교실을 나선다. 교문까지의 거리는 약 150. 기찬이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제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문 밖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정명선 씨(43세·가명)가 길가에 차를 대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정 씨는 뛰어오는 기찬이를 향해 창문을 내리고 손짓한다.

    “기찬아, 빨리 와. 학원 가야지.”

    기찬이는 헐떡거리며 차에 올라탄다. 차 안엔 기찬이가 좋아하는 핫도그와 우유가 있다. 좀 이른 저녁 식사다. 어머니는 기찬이의 안전벨트를 채운 뒤 서울 강남 학원가를 향해 시동을 켠다. 오후 3시쯤 학원 근처 도착. 기찬이와 어머니는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향한다. 벌써 6개월째 똑같은 ‘코스’다.

    어머니는 두 손 가득 학원 교재를 들고 기찬이와 함께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기찬이는 미처 끝내지 못한 영어 숙제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수업 시작까진 아직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어머니는 숙제 하는 기찬이 옆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 인터넷 자녀교육 커뮤니티에 접속해 새로 올라온 글을 읽는다.

    ◆종합반 끊고 ‘주요 5개 과목’ 단과반 수강

    현재 기찬이의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다. 5학년 땐 공부를 곧잘 했지만 6학년 올라오며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학원엘 안 다닌 것도, 보충수업을 안 받은 것도 아닌데 좀처럼 5학년 때 성적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5학년 땐 종합반 학원을 다녔어요. 성적이 상위권이어서 별 걱정이 없었죠. 한 곳에서 전과목을 공부할 수 있어 엄마도 지금처럼 절 따라다니지 않으셨고요. 그런데 5학년 겨울방학부터 같이 학원에 다니던 친구들이 하나둘 종합반을 그만두더라고요. 그러려니 했는데 6학년 되니까 저보다 성적 낮았던 애들이 금세 치고 올라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유가 뭔지 몰랐어요.”

    어머니 정 씨는 “엄마들 사이에서 어느 학원은 국어(수업)가 괜찮더라, 어느 학원은 수학을 잘 가르친다더라 식의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단과반 학원이 유행한 모양”이라며 “소문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람에 다른 엄마들보다 대응이 한발 늦어졌다”고 말했다.

    6학년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아든 후 기찬이는 조급해졌다. 학원 문제인가 싶어 지난 4월엔 종합반도 그만뒀다. 그리고 친구들처럼 과목별로 소문난 선생님을 찾아 국어·영어·수학·과학·사회 등 ‘필수 5개 과목’ 수업을 죄다 서로 다른 학원 단과반 수업으로 등록했다. 커피전문점을 중심으로 근처 학원을 빙빙 도는 일과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 “아이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좀처럼 안 올라요. 시험 때만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죠. 자기보다 못했던 애들이 앞서가기 시작하니 조바심이 나나 봐요. 시험 보고 올 때마다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요. 저라도 챙겨주면 아이가 좀 편하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따라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학원 인근 카페서 서너 시간씩 대기

    수요일이었던 지난 6일 오후, 기찬이의 ‘학원 시간표’는 ‘영어-과학-수학’이었다. 영어 수업은 오후 4시부터 90분, 과학과 수학 수업이 이후 각 한 시간씩이다. 수업이 진행되는 약 네 시간 동안 어머니는 커피전문점에서 줄곧 기찬이를 기다렸다. 기찬이는 한 과목 수업이 끝날 때마다 커피전문점에 들러 교재를 바꿔 가져갔다.

    기찬이의 손에 들린 짐이라곤 필기구와 교과서가 전부. 다른 짐은 몽땅 어머니가 보관했다. 기찬이가 한 과목 수업 후 들를 때마다 어머니는 기찬이가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묻고 메모했다. “매일 이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어떨 땐 기찬이보다 제가 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멋적은 듯 웃었다.

    저녁 8시, 이날치 수업을 다 들은 기찬이가 커피전문점에 들어섰다. 언뜻 봐도 피곤에 지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씩씩했다. “아직은 성적이 제자리를 맴돌지만 공부하기 싫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엄마가 도와주시고 저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곧 좋은 결과가 있겠죠. 나중에 좋은 대학 가서 고생하시는 엄마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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