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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2010 프로야구 두산과 롯데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 9회 2·3루 상황에서 두산은 프로 2년차 정수빈을 대타로 내세웠다. 롯데 임경완의 공 세 개가 연속으로 볼이 되자, TV에서 나지막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정수빈은 지금을 노려야 돼요. 스트라이크 잡기 위해 들어오거든요.”
“땅!” 롯데 투수 임경완이 네 번째 공을 뿌리는 순간, 경쾌하고 힘찬 소리가 구장을 가득 채웠다. 왼쪽을 훌쩍 넘기는 3점 홈런이었다. 이 홈런 한 방이 3대 2로 쫓기던 두산의 분위기를 단번에 뒤집었다.
“김경문 두산 감독 스타일로 봐선 타격하라고 지시했을지도 모르는데 롯데 쪽 배터리(투수와 포수)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어렵게 갔어야죠.” 해설가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경험에서 나온 순간적 상황 판단, 자로 잰 듯 정확한 해설. 야구 해설가는 프로야구 흥행을 이끄는 또 하나의 ‘숨은 공신’이다. 그 중심엔 야구 해설 30년 외길을 걸어온 허구연(59세) MBC 야구해설위원이 있다.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1차전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오전, 대구행 KTX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는 허 위원을 어렵게 붙잡았다. 그가 들려주는 ‘야구 해설가의 세계’를 지면에 옮긴다. -
-야구 해설가의 역할이 궁금해요.
“국내 프로야구 중계는 캐스터(caster·진행자)와 해설가가 한 팀을 이룹니다. 캐스터는 선수 소개, 상황 설명, 경기 기록을 반복해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해설가는 보다 전문적으로 시청자에게 다가서야 해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왜 저런 플레이가 이뤄졌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지 예측해 설명하는 게 주된 역할이지요. 경험과 직감에서 비롯된 순간적 판단을 시청자에게 전하고 설명하는 겁니다.”
-최근 높아진 프로야구 인기만큼 야구 해설가를 꿈꾸는 사람도 많아졌는데요.
“요즘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이메일로 문의해오는 분이 부쩍 늘었어요. 대부분 ‘어떻게 하면 야구 해설가가 될 수 있냐’는 질문이죠(웃음).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야구 해설가가 되려면 야구를 할 줄 알아야 해요. 단순히 경기를 보는 것과 실제 마운드에 서는 건 엄청난 차이거든요. 물론 선수로 성장해 프로 무대에서 뛰어본 경험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오랜 현장 경험을 거친 사람에겐 자연스럽게 상황 판단 능력이 생깁니다. 비단 해설가뿐 아니라 캐스터·스포츠 기자 등 모든 야구 관련 직업이 마찬가지예요. 다음으로 필요한 건 공부입니다. 야구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훤한 사람은 표현력도 남다르거든요. 맛깔스러운 말솜씨 역시 해설가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니까요. 해외 선진 야구를 이해하려면 틈틈이 영어 공부도 해두는 게 좋겠고요.”
-야구 해설을 하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하나만 꼽는다면요.
“예전 야구 용어는 대부분 일본말로 돼 있었어요. 뜻은 통했을지 몰라도 대부분 어법에 맞지 않는 엉터리 표현이었지요. 프로야구에서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 야구용어을 사용하기 시작한 게 제가 해설을 맡으면서부터였어요. 이젠 상당 부분 개선됐고 그 점을 가장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
-해설 외에도 야구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죠?
“야구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는데 시설이나 환경 부문이 너무 열악해요. 여전히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야구팬이 낡고 좁은 경기장에서 야구를 봅니다. 올해 프로야구 관람객이 592만 명이었어요. 전년도 기록을 넘어서는 역대 최다 관중수지요. 하지만 야구업계의 오랜 목표인 600만 관중엔 한참 못 미칩니다. 현재 국내 구장의 대부분이 1만 명을 겨우 수용하는 수준이거든요. 대안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볼파크(ball park)를 만드는 겁니다. 볼파크란 야구뿐 아니라 축구, 테니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다목적 경기장을 말해요. 전 매번 중계 때마다 이 얘길 꺼냅니다. 유소년 체육 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도 볼파크는 꼭 있어야 해요.”
-야구 선수나 해설가를 꿈꾸는 어린이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전 중계할 때 잘하는 선수가 눈에 띄면 칭찬을 많이 합니다. ‘스타’를 만들기 위해서지요. 그 때문에 다른 팀 팬에게 욕도 먹습니다. 하지만 야구산업은 스타 선수를 업고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제 칭찬을 들으며 자란 선수들이 지금 우리 프로야구의 대표 선수로 활동하고 있지요. 제가 뜬금없이 이 얘길 꺼내는 덴 다 이유가 있어요. 야구 해설가를 단순한 직업으로 생각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야구를 정말 좋아하고 야구의 발전을 고민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지요. 진심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 야구라면 만사 제치고 뛰어들겠다는 자세,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멋진 야구선수나 해설가가 될 수 있어요.”
[The 인터뷰] 프로야구 흥행 이끈 '숨은 공신' 허구연 해설가 "오랜 경험과 순간적 판단에서 맛깔스러운 해설 나오죠"
김재현 기자
kjh10511@chosun.com
일본식 엉터리 용어 개선돼 뿌듯
"야구 발전 위해 볼파크 개장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