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에선 6년씩 한 학교에 다니면서도 서로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모르는 어린이가 태반이다. 커다란 TV와 스크린, OHP 시설을 갖춘 근사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특별활동 수업을 받지만, 하루종일 흙 한 번 못 밟아보고 시멘트 건물만 맴맴 도는 어린이도 적지않다. 전교생이 수백 명씩 되고 30명 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 모여 생활하는 ‘대형 학교’의 그림자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작은 학교도 많다. 개구리와 연꽃을 벗 삼아 뛰놀 수 있는 자연환경, 저마다 특색 있는 교육 프로그램, 소신껏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큰 학교는 무조건 나쁘고 작은 학교만이 정답이란 얘긴 아니다. 다만 큰 학교가 규모에 눌려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을 작은 학교는 세심하게 보듬고 챙길 수 있다. 작은 학교의 장점이다. 소년조선일보는 오늘부터 5주간 매주 금요일 ‘작지만 강한 학교’ 탐방기를 싣는다. 전국을 발로 뛰며 찾아낸 ‘작은 학교의 기적’을 통해 도시 어린이들이 좀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경기 용인시 원삼면 두창리 871번지. 원삼초등학교 두창분교(분교장 방기정) 운동장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낮은 담을 따라 늘어서 있다. 그네·시소·미끄럼틀이 놓인 공간 왼쪽으로 눈에 띄는 건 조그마한 닭장. 모두 여덟 마리의 닭이 어린이들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2층짜리 학교 건물에 들어서면 벽면에 붙어 있는 사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목은 ‘자랑스러운 두창 어린이’. 이 학교 전교생 50명의 프로필 사진을 붙여놓은 ‘대형 사진첩’이다.
◆논두렁을 달리고, 텃밭도 가꾸고
두창분교 어린이들은 일주일에 세 번(화·수·목요일) 2교시 수업 후 쉬는 시간 10분을 활용해 학교 앞 논두렁을 달린다. 이름하여 ‘논두렁 달리기’다. 특히 요즘처럼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면 어린이들의 뜀박질엔 더욱 힘이 실린다. 논두렁 달리기를 처음 제안한 건 방기정 분교장 선생님이다. “요즘은 시골 아이들도 자연을 잘 몰라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릴 때부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디뎌봐야죠.”
‘텃밭 가꾸기’도 이 학교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두창분교에선 매년 봄이 되면 전교생을 대상으로 ‘길러보고 싶은 식물’을 조사한다. 식물이 선정되면 다섯 명의 선생님이 5일장에 가서 모종을 사온다. 텃밭에 모종을 심고 기르는 건 학생들의 몫이다. 텃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식물은 감자·상추·토마토와 같이 열매나 잎을 따서 함께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올해는 감자가 풍년이었다. 덕분에 학생들은 감자를 캔 후 각자 집으로 가져갈 한 바구니씩의 감자를 선물로 얻었다. 10월엔 고구마도 수확할 예정이다. -
“가을이면 형·누나들과 함께 학교 뒷산 밤나무로 가 밤을 따와요. 따온 밤은 학교에서 쪄먹기도 하죠. 밤 딸 때가 되면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과 고모, 삼촌까지 모시고 와요. 밤 따기가 있을 때마다 학교가 사람들로 북적거려요.” 김경수 군(1년)은 “친구들과 함께 밤이나 고구마를 쪄먹을 때가 제일 신난다”고 말했다.
◆운동장 난상토론 ‘다모임’도 인기
시골 학교라고 해서 자연 체험활동만 있는 건 아니다. 두창분교는 학생들의 토론 문화를 길러주기 위해 ‘다모임’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거창한 행사를 따로 마련하진 않는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학생들이 관심 갖고 있는 여러 문제 중 하나의 주제를 정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는 게 고작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시민들이 아크로폴리스(Acropolis) 광장에 모여 정치나 경제 문제를 얘기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이다.
“학교생활을 하며 느낀 점, 어린이로 살면서 불편한 점, 도움받은 친구에 대한 고마운 마음 등을 주로 얘기해요. 혼자선 말 잘하는 친구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얘길 시키면 잘 못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다모임’을 통해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편안하게 말하는 훈련을 할 수 있어 좋아요.” 최재영 군(6년)은 “더욱이 우리 학교는 도시 학교와 달리 ‘푸른 자연’이 갖춰져 있어 친구와 훨씬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두창분교의 특색 있는 프로그램 뒤엔 방기정 분교장 선생님의 독특한 교육 철학이 숨어 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 때 캐나다로 유학 간 학생이 있었어요. 한국에 있을 땐 수학을 못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캐나다에선 수학 영재로 뽑혔다더군요. 여름 햇볕을 충분히 쬐지 못한 과일을 당장 따버리면 설익어 맛이 없어요.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성장 속도에 맞춰 가르쳐야지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초등 교육의 가장 큰 목표는 어린이란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올해만 도시학교서 17명 전학 와
이런 선생님의 소신이 설득력을 얻은 걸까? 올 한 해만 17명이 도시에서 두창분교로 학교를 옮겼다. 올 2월 졸업생은 19명. 3월에 동네 어린이 네 명이 1학년으로 입학했으니 전교생은 올해 두 명 늘어난 셈이다.
요즘도 방 분교장 선생님은 학부모의 상담전화를 하루 몇 통씩 받는다. 상담 내용은 별도 노트를 만들어 꼼꼼하게 기록해놓았다. 나중에라도 비슷한 내용의 상담전화가 걸려왔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학교 곳곳을 돌며 만난 두창분교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밝고 적극적이었다. 이유빈 양(2년)은 글쓰기 수업과 논두렁 달리기, 동네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귀여운 소녀였다. “아저씨, 저희랑 산책 가실래요? 저 친군 김예원이라고 저보다 한 학년 아래 동생이에요.”
아이들은 산책 도중 골목길 어귀에 핀 꽃이며 나무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저건 맨드라미고요, 저건 밤나무. 무궁화는 아시죠? 아, 저건 연꽃이에요. 아저씨, 연꽃잎 좀 따주실래요? 예원아, 우리 연꽃잎에 무궁화랑 장미랑 따서 넣자.”
[테마기획 | 작은 학교가 강하다] (1) 경기 용인 원삼초등학교 두창분교
용인=손정호 인턴기자
wilde18@chosun.com
아이 성장에 맞춰 천천히… 뿌리 튼튼한 '꿈나무'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