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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 22~24일 지구 위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 포뮬러원(F1) 그랑프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최된다. 전라남도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펼쳐질 ‘2010 코리안 그랑프리’를 앞두고 F1 그랑프리의 모든 것을 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F1 그랑프리의 역사
매주 주말이면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자동차 경주가 치러진다. 출전 차는 물론, 경주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올림픽, 월드컵축구대회와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불리는 포뮬러원(F1) 그랑프리는 수십 가지 자동차 경주 중에서도 최정상급 대회로 꼽힌다. -
F1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은 건 1950년이었지만 그 뿌리는 자동차 경주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에 열광하던 속도광(狂)들은 자동차가 거리에 등장하자 경쟁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1886년 첫 자동차가 등장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자동차경주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초기의 자동차 경주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경기였다. 당시 경주용 차는 지금과 달리 개별적으로 출발했다. 우승자는 완주에 걸린 시간에 따라 결정했다. 역사상 가장 처음 열린 자동차 경주는 1894년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이 주최한 ‘파리-루앙’ 구간 레이스였다. 총 80마일(130㎞)을 달리는 경주였는데 당시 경주용 차는 위험하지 않았고 운전하기 쉬웠다. 돈도 많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동차 경주는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중단 위기를 맞았다. 1901년 파리-베를린 경기, 1903년 파리-보르도-마르세유 경기에서 잇따라 관중이 차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 것. 하지만 자동차 업계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견뎌냈다.
이후 자동차 경주 대회엔 ‘도로 양쪽에 장벽을 만들고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게 훗날 서킷(자동차 경주 전용 도로) 경기의 계기가 됐다. 1904년엔 독일 함부르크에 국제자동차공인클럽협회(AIACR)가 설립됐다. 이후 저마다 다른 차들이 공평하게 경주를 벌일 수 있도록 차의 무게를 제한하는 규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규칙에 맞는 차를 ‘포뮬러(Formula)’라고 부르게 됐다. -
1907년, 마침내 영국 서리주(州) 브랜우즈에 최초의 서킷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자동차 경주 산업은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경제 불황이 닥친 데다 경기 규정과 경기장을 둘러싸고 각 단체 간에 갈등이 빚어진 것. 1909년 급기야 프랑스가 경주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같은 해 미국에선 인디애나폴리스 모터스피드웨이가 문을 열면서 자동차 경주가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레이스는 동부에서 서부로 퍼져나갔고, 경기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경주용 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에 이르러서야 기본적인 틀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유럽 레이싱 시장은 또 한 번 위기를 맞았고, 다시 활기를 찾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921년 프랑스 르망에서 개최된 프랑스자동차클럽(ACF) 그랑프리는 전쟁이 자동차 경주에 미치는 영향을 알려준 대회였다. 전쟁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국 선수들은 유럽파 선수들을 압도하며 레이스를 휩쓸었다. -
1929년 자동차 경주는 전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경주용 차가 등장하고 몇몇 유명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관중을 열광시켰다. 또한 이 시기에 미국 자동차클럽(AAC)은 인디애나폴리스에 포뮬러를 도입했다. 자동차 업체를 다시 경주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대공황이 서서히 끝나가던 1930년, 이 작전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기 주관단체가 그리드(자동차 경주 출발선)를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경주용 차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이 때문에 훗날 대공황은 자동차 경주의 공백이라기보다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험기였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모터 스포츠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몇 년간 짧지만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나치 정부가 자동차 경주를 선전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자국 독일의 자동차 회사 벤츠와 아우토 유니온(현재의 아우디)을 별도로 지원하면서 경주용 차의 기술과 출력이 개선됐다. 자연히 레이스는 더욱 화려해졌다. 덕분에 이 시기의 자동차 경주는 독일 팀들이 휩쓸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독일 독점시대’는 독일의 2차대전 패배와 함께 끝나버렸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며 전쟁이 끝났다. 그와 함께 다시 자동차 경주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인한 연료 부족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자동차 경주가 본궤도에 오른 건 1947년이었다. 1947년은 특히 국제자동차연맹(FIA)이 결성되며 모터 스포츠계가 전환점을 맞은 시기이기도 하다. 국제자동차연맹은 1950년 새로운 공식 규격을 정한 후,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만들고 ‘포뮬러원(Formula1)이라고 이름 붙였다. 모터 스포츠계가 새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꿈의 레이스 F1 그랑프리] F1 그랑프리의 역사
"124년 전 첫 레이싱은 도시를 잇는 안전한 경기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