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서 와, 얘들아. 그냥 앉으면 안 되지! 손부터 씻고 먹어야 돼.”
‘모니카 선생님’서희 씨(27)가 아이들을 다그친다. (모니카는 서희 씨의 세례명이다.)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이곳의 ‘가족’ 은 다른 가정과 좀 다르다. 인천 화수동에 있는 ‘민들레꿈 어린이 밥집’ 얘기다.
지난 8월 25일 오후,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을 찾아나섰다. 냉면으로 유명한 화평동 거리를 지나 빽빽한 주택가 사이를 가로질러 내려가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동네는 원래 ‘민들레 국수집’ 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민들레 국수집은 노숙자 등 끼니조차 때우기 어려운 이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 2003년 문을 연 후 입소문이 나며 인천은 물론, 서울·안양·수원 등 인근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영남(56) 민들레 국수집 대표는 “우리 집에 찾아오는 이들 중엔 간혹 어린이도 섞여 있었다 ”며 “하지만 어린이들은 대부분 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눈치만 살피다가 들어오라고 손짓하면 도망가기 일쑤였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배가 고파 근처 분식집에 들어갔는데 한 어린이가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우연찮게 이튿날도 똑같은 곳에 가게 됐는데 어제 봤던 아이가 또 혼자서 밥을 먹고 있더군요. 분식집 주인에게 물어보니 매일 그렇게 밥을 먹으면 부모가 퇴근길에 들러 계산하고 간대요. 그 아이가 굉장히 비만이었거든요. 매일 밀가루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 영양 상태가 좋을 리 없었죠.”
그날 이후 서영남 대표는 막연하게 품었던 ‘어린이를 위한 밥집’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가 올 2월 문을 연 민들레꿈 어린이 밥집이다. 민들레 국수집과의 거리는 불과 150m였다. -
3층짜리 건물 중 서 대표가 쓰는 공간은 1층과 3층이다. 1층은 밥집으로, 3층은 어린이 공부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40㎡(약 12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아기자기한 식탁, 어린이들이 맘껏 뛰놀아도 넘어지지 않는 밝은 나무색 타일, 오랫동안 책을 읽어도 눈이 피곤하지 않은 조명…. 아버지를 도와 밥집과 공부방의 운영을 맡고 있는 서 대표의 딸 서희씨는 “아버지와 친한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밥집과 공부방 설계를 맡았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밖에서 쭈뼛거리던 아이들도 막상 식당 안에 들어오면 금세 편안하게 적응하더라고요. 그만큼 어린이의 시각에서 세심하게 설계해주신 거죠.”
2010년 8월 말 현재 밥집을 이용하는 ‘어린이 고객’ 은 줄잡아 60명 안팎이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드나들었던 어린이가 열 명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숫자다. 이곳을 찾는 어린이 대부분은 한부모 가정이나 조손 가정(부모 없이 할머니·할아버지와 손자·손녀가 함께 사는 가정),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이다.
서씨는 “처음 밥집을 찾았던 아이들이 자기 친구를 한두 명씩 데리고 오면서 점차 ‘손님’ 이 늘고 있다” 며 “요즘은 제법 먼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곧잘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이날 만난 열한 살 최정원 군(가명)은 “친구들도 있고 선생님이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주셔서 거의 매일 밥집에 온다”며 “간식을 먹고, 공부방에 올라가 책 읽고, 친구들과 그림 그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이곳에선 ‘꿈 먹는 아이들’ 이란 제목의 작은 그림 전시회도 열렸다.밥집 단골 어린이 고객 열한 명이 전시회를 위해 그림 솜씨를 뽐냈다. 이날 전시회를 위해 지난 2년간 매주 일요일 밥집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온 만화가 신향래 씨(41)는 전시 개막일에 축하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보내오기도 했다.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한 아홉 살 조민희 양(가명)은 “내 모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봤는데 모니카 선생님이 ‘아주 잘 그렸다’ 고 칭찬해주셔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2010년 9월, 민들레꿈 어린이 밥집은 또 한번 도약한다. 남에게 세 줬던 건물 2층을 비워 ‘민들레 꿈 어린이 도서관’ 을 만들 예정이기 때문. 조만간 ‘밥집-도서관-공부방’ 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어린이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서영남 대표는 “내 꿈은 지금보다 많은 아이들이 이곳을 찾아 함께 밥 먹고 공부하는 것” 이라며 “앞으로 아이들이 좀 더 많은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민들레꿈’같은 공간이 전국 곳곳에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락모락' 사랑의 밥 먹으며 꿈도 '모락모락'
인천=김재현 기자
kjh10511@chosun.com
민들레꿈 어린이 밥집
올 2월 문 연 '민들레꿈 어린이 밥집'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