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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저녁 전남 신안군 암태면 암태중학교.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4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섬마을 학교에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친 바다에서 힘든 하루를 보낸 주민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엔 그러나 피로감보다는 작은 설렘과 흥분이 엿보였다. ‘섬드리합창단 섬마을 순회공연’. 교문 앞에 내걸린 하얀 현수막이 시원한 바닷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날 무대에 오른 ‘섬드리합창단’은 국내외에서 많은 공연을 펼쳐온 인기 어린이 합창단. 올 1월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내 나라 여행박람회’에, 지난해 9월엔 ‘인순이 사랑나눔 콘서트’에 특별출연했다. 일본·미국 등에서 초청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
그러나 이날 무대에 오른 단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처음으로 친구·가족·이웃들 앞에 선 까닭이었다.
섬드리합창단은 2002년 광주KBS가 주최한 섬어린이동요대회에서 입상한 신안군 어린이들이 ‘조르고 졸라서’ 생겨난 합창단. 당시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간 박인태 전 KBS 프로듀서가 어린이들의 열성에 감동해 합창단을 꾸리고 단장을 맡았다. 박 단장은 “40여 년을 오로지 어린이 동요 프로그램만 제작해 오다가 그해 가을 은퇴를 하게 됐다”면서 “동요를 통해 아이들 정서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섬마을 어린이들로만 구성된 합창단 활동은 쉽지 않았다. 고사리 일손 하나가 아쉬운 부모님들은 자녀의 합창단 활동을 큰 소리로 반대하기 일쑤였다. 배와 버스를 갈아타고 2~3시간씩 걸려 연습실이 있는 목포까지 나오는 길도 녹록지 않았다. 박희준 군(암태초등 6년)은 “파도가 높아 뱃길이 막히면 발만 동동 구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합창단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감을 얻고 적극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부모님들은 어느새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다. 2005년, 섬드리합창단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박 단장이 직접 극본을 쓴 창작 뮤지컬 ‘섬집아기의 노래’를 무대에 올리기로 한 것. 섬드리합창단의 힘들었던 창단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합창단은 박 단장의 쌈짓돈과 매월 두 차례씩 서울과 목포를 오가는 지도 선생님들의 자원봉사로 근근이 운영되고 있다. 2005년부터 연출을 맡고 있는 차영선 감독은 “힘든 점도 많지만 순수한 아이들의 열정이 좋아서 기쁘게 서울과 목포를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공연엔 탤런트 사미자 씨와 연극인 공호석·조승현 씨가 힘을 보탰다. 모두 자원봉사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게 많다고 입을 모았다. 극중 정 선생 역을 맡은 사미자 씨는 “처음엔 섬마을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그곳 사람들이 날 보면 즐거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했다”며 “그러나 순박한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오히려 내 마음이 깨끗이 씻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재 합창단은 초등 4년부터 중 3년까지 모두 18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3쌍은 자매·형제·남매 사이다. 하인학 군(압해초등 5년)은 “5년째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형이 ‘정말 보람 있고 재밌다’며 입단을 권유해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혜주·민수 남매(지도초등 5년·4년)도 몇 개월 차이로 입단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번 창단 8주년 기념 공연은 압해도·증도·암태도 등 전남 신안 앞바다의 섬을 차례로 돌며 진행됐다. 이 세 섬은 가장 많은 단원을 배출한 곳이어서 더욱 뜻깊었다. 단원장 김민주 양(압해중 3년)은 “잘 아는 곳,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처음 하는 공연이라 다들 많이 긴장했다”면서도 “열심히 준비한 만큼 후회 없는 공연을 펼쳐 그 어느 때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이번엔 고향마을서 '설레는 무대'
목포=류현아 기자
haryu@chosun.com
창단 8년 섬드리합창단, 사미자 선생님과 섬마을 순회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