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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달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산골 지주가 발끈했습니다.
“어째서 내 죽에는 초를 치지 않는 거야? 아주 고약한 것들이네.”
“나리, 녹두죽에 초를 쳐서 드십니까? 저는 한양의 양반님들만 그렇게 드시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이 나를 시골뜨기인 줄 아나? 내 죽에도 초를 넣으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
김 선달은 얼른 대답하곤 부엌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분 죽에도 초를 쳐요. 한양의 양반님네들처럼 잔뜩 치지 말고 딱 한 방울만 쳐요.”
“한 방울이라니, 누굴 놀리나? 내 죽에도 초를 잔뜩 치라니까!”
“그럴까요? 저는 나리께서 시골 양반이라서 초 맛을 모르실 것 같아서….”
“이 사람아, 이래봬도 내가 한양의 양반들과 식성이 같단 말이야. 내가 한양에 가면 무슨 음식이든 다 잘 먹는다고.”
“아, 그러십니까? 몰라 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 선달은 미안한 척 허리를 굽실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습니다.
"여보, 이분의 죽에도 초를 잔뜩 쳐요. 한양의 양반네들처럼.”
“예, 알겠어요.”
부엌에 있는 아내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을 척척 했습니다. 이윽고 녹두죽이 나왔습니다. 산골 지주는 죽그릇에서 한 숟가락 떠먹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아유, 시어.”
당연했습니다. 쉰 죽을 따뜻하게 데워 갖다 주었으니 말입니다. 이때 김 선달은 능청스럽게 말했습니다.
“한양의 양반네들과 식성이 같으시다면서요? 그런 분이 어째서 이 죽이 시다고 투덜거리십니까?”
“투덜거리긴…. 시어서 맛이 좋다는 거지."
산골 지주는 시어도 아무 소리 못하고 녹두죽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과연 녹두죽은 초 맛이군. 초를 잔뜩 쳐야 제 맛이 난단 말이야.”
산골 지주에게 쉰 죽을 먹인 김 선달은, 산골 지주가 밖으로 나가자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하하, 통쾌해라! 저 작자를 단단히 곯려주었어.” -
>>>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먹었다'해서 '말죽거리'
1624년(인조 2년) 2월 8일이었다. 인조는 서울을 떠나 신하들과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었다.
“참담하구나.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이렇게 서울을 내주고 피란길에 오르다니.”
인조는 어두운 얼굴로 말 위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서둘러 남쪽으로 향하다가 양재역에 이르렀다.
양재역은 당시에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말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양재도찰방이 있어 나랏일로 출장을 가는 사람들에게 잠자리도 제공했다. 양재역 부근에는 역촌, 즉 ‘역말’이라 불리는 마을도 있었다.
인조는 양재역에 닿을 때쯤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역말에 사는 유생들이 급히 달려와 팥죽을 바쳤다. -
“전하, 이 팥죽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
“고맙구나. 오늘 그대들이 베풀어 준 은혜는 잊지 않겠다.”
인조는 갈 길이 바빴기 때문에 말 위에서 죽을 먹고 과천 쪽으로 향했다. 이때부터 이곳은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먹었다’고 ‘말죽거리’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이곳 마을에 말죽을 쑤어 먹이는 집이 많다고 해서 지방 사람들이 ‘말죽거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현배 작가의 맛 이야기] 죽과 봉이 김 선달(하)
인색한 산골 지주, 김 선달에게 속아 쉰 죽을 먹으면서도
"역시 녹두죽은 초를 쳐야 제 맛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