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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오전 9시 회사원 조은영(33·가명)씨가 딸(4)과 함께 서울 서초구 P어린이집 현관에 도착해 약 바구니에 아이 감기약을 넣었다. 조씨는 "아이 이름과 반, '식후 30분 뒤, 물약 10㏄'라고 적어 놓으면 양호 선생님이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여준다"고 했다.
P어린이집 3층 건물은 아이들 안전을 배려해 지어졌다. 교실 중앙 기둥은 부딪혀도 다치지 않게 종이로 두툼히 감싸져 있다. 갈색과 초록색 색지로 감싸 마치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 같다.
이날 원어민 교사 섀넌(Shannon·26)씨는 5세 아이들 20여명에게 둘러싸여 영어를 가르쳤다. 아이들은 나무 블록으로 동네 모형을 만들고 다리 모형에 'Bridge', 대학교 모형엔 'University'라고 적힌 종이를 붙였다. 섀넌씨는 암기를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과 놀면서 가르쳤다. 이 반엔 섀넌씨 말고도 보육 교사 2명이 더 있었다. 교사 1명당 아이들 10명을 돌보는 셈이다. 보건복지부가 권장하는 기준(교사 1명당 20명)보다 훨씬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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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 기업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직장 보육시설인 P어린이집은 학부모들에게 만족도가 높은 곳으로 유명하다. 학부모 박경숙(39·회사원)씨는 "영어도 잘 가르쳐 사교육을 별도로 시킬 필요도 없고 농협에서 식자재를 가져와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이곳은 밤 10시까지도 아이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에 퇴근이 늦은 직장인들도 안심하고 아이를 맡긴다. P어린이집은 입학 대기자가 300여명이나 된다.
이 어린이집의 1~5세 월평균 보육비는 73만여원(특별활동비 5만여원 포함)이다. 하지만 실제 학부모 부담은 절반인 36만원 안팎이다. 나머지는 어린이집에 출자한 기업과 노동부 지원금으로 충당한다. 일반 어린이집 1~5세 월 평균 보육료 35만원(특별활동비 10만원 포함)과 비슷한 수준이다. P어린이집을 운영하는 P보육지원업체 관계자는 "기업지원금과 직장 보육시설에 대한 정부지원금이 있어서 일반 어린이집보다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다"며 "학부모들 부담도 크지 않아 대부분 만족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P어린이집처럼 기업이 출자한 곳이 아닌 경우 질 좋은 보육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국·공립을 포함한 어린이집에 대해 보건복지부가 0~5세 보육료 한도액(월 평균 25만~28만원)을 정해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육료 규제를 풀지 않으면 만족할만한 어린이집이 별로 없어 어린이집에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기기 어렵다는 게 학부모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반면 어린이집과 달리 교육과학기술부가 관리하는 유치원(3~6세)은 보육료가 자율화돼 있다. 2009년 평균 보육료가 30만3000원이지만 사립 유치원은 100만원이 넘는 곳도 있다. 문제는 대부분 유치원이 오전 9시부터 오후 2~3시까지만 운영한다는 점이다. 유치원에 3세 딸을 보내는 회사원 김미정(34)씨는 "종일반이 있어도 5~6시 이후까지 봐주진 않는다"며 "5~6시에 끝나도 도우미 아주머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에야 밤 10시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야간 돌봄 전담 유치원' 175곳이 시범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1991년 '영유아보육법'이 제정된 이래 20년간 '보편 보육'논리에 따라 어린이집 이용료와 운영을 제한하고 있다. 규제를 풀면 보육료가 계속 올라가게 되고, 소득과 관계없이 누구나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정호 연구위원은 "정부가 부모의 요구에 못미치는 보육기준을 바탕으로 보육료를 산정해 보육의 질이 하향 평준화됐다"며 "정부가 보육비를 제한하니 보육시설이 다양해지지 않고 보육시설 간 경쟁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모에게 받을 수 있는 돈이 한정돼 있어 시설에 투자하기도 힘들고 좋은 급식재료를 쓰기도 어렵고 저임금 보육교사를 채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또 "보육시설·유치원·학원에 대한 감독기관을 일원화하고 어린이집·유치원·학원을 통합한 뒤 보육료를 자율화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숭실대학교 김현숙 교수(경제학)는 "보육시설에 대한 등급제를 실시하고 보육 시장 일부를 영리법인에 개방해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정부의 보육료 지원 확대를 주문하고 있다. 재단법인 한국보육진흥원 박숙자 원장은 "연간 2조1000억원 정도인 보육료 지원액을 늘려 저소득층에 국한된 혜택을 중산층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숙 교수는 "보육료 지원이 가장 절실한 맞벌이 부부에 대한 지원액을 늘리고 세금을 줄여주는 세액 공제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부부 애태우는 '보육 현실'] [4·끝] 정부 규제가 보육 장벽
어린이집 보육료 정부서 묶어… 저임금 교사에 급식 질도 낮아, 보육 수준 하향 평준화
보육료 자율화하고, 맞벌이 부부 혜택 늘리고, 정부 보육료 지원확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