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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은 7년간 난중일기를 쓰셨고, 제가 그것을 해독하는데 7년이 걸렸어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일심(一心)’을 수결(手決·사인)로 썼던 충무공 이순신의 초지일관(初志一貫)됨이 이런 것일까. 대학원 시절부터 이순신 장군에 빠져 지냈던 40대 학자는 “충무공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 인품에 매료된다”고 했다. “장군의 필체엔 중후하면서도 웅장한 인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전쟁 중 초서체로 급하게 쓴 탓에 그걸 해독하는 데는 정말 어려움이 많았어요.” 난중일기 첫 권인 임진일기 영인본을 펼쳐든 그의 얼굴엔 고생스러웠던 세월만큼이나 보람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최근 난중일기 최초의 완역본을 출간한 노승석 교수(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를 제465주년 충무공탄신일(4월28일)을 닷새 앞둔 지난 23일 만났다. -
-난중일기 최초 완역본 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간 해독되지 못했던 글자들을 모두 해독하고, 자잘한 명칭이나 인명, 지명 등 100여곳의 오류를 바로 잡아 초고본 원문과 원뜻에 가장 가깝게 풀이했다는데 있어요.”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나왔습니까?
“을미일기(1595년)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충무공의 인간적 면모가 흥미롭습니다. 충무공은 권율 장군에 대해 ‘전쟁 중 군사작전을 수행하면서 상부에 보고한 내용이 상당히 기만적’이라고 지탄합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어떻게 원수의 자리에 둘 수 있냐’며 직접적인 비난도 마다않지요. 원균에 대해선 ‘천지간에 이렇게 흉악하고 거짓된 자가 없다’며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충무공을 연모한 한양 기생 내산월(萊山月)이 거북선을 만들 때 금괴를 바친 사실도 눈길을 끕니다.”
-조선시대에도 난중일기에 대한 해독작업은 있었습니다. 왜 400여년 전의 해독이 더 정확하지 않았을까요?
“난중일기 해독작업은 정조 때 비로소 진행됐어요. 하지만 판독작업이 매우 부실했어요. 조선시대엔 무신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고, 충무공이 문신으로 관직에 나갔지만 무신으로 이름을 알렸기에 그가 남긴 글 역시 대접을 못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인간 이순신’은 어떤 인물입니까?
“상황에 맞는 능숙한 리더십을 가졌지요. 인정이 많고, 동정을 할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을 베풀 줄 하는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군율엔 엄격했어요. 난중일기에는 잘못을 저지른 병사들의 목을 벴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온 국민이 비통함에 빠져있습니다만.
“치밀한 계획 하에 군사를 움직였던 충무공이 이번 사건을 보셨다면 세심한 대비를 하지 못한 걸 개탄스러워 했을 겁니다. 철저히 원인을 밝히고, 문제가 있었다면 엄격한 책임 추궁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겠지요.”
-‘충무공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 항상 몰두하고 집중하는 정신입니다. 수결로 쓰신 ‘일심(一心)’을 봐도 알 수 있지요. 또 다른 하나는 ‘효(孝)’입니다. 충무공은 지극히 효심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의 근원도 바로 ‘효’에서 비롯됐지요.”
-충무공에 대해 더 밝혀야 할 사실이 있나요?
“충무공의 유년시절이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게 없습니다. 사실 위인전 내용은 흥미를 위해 쓰여졌을 뿐 정확한 사실은 아니지요. 또 이순신 장군의 개인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 저술이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이를 찾아내는 게 앞으로의 연구과제이지요”
-옛 문헌에 대한 정확한 해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자가 쓴 원뜻을 알기 위한 거지요. 그게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의 기록엔 한치의 거짓도 들어가선 안되지요.”
[The 인터뷰] '난중일기' 최초 완역 노승석 교수 "충무공의 7년 일기 해독하는데도 7년 걸렸죠"
우승봉 기자
sbwoo@chosun.com
100여곳 오류 바로 잡아
원문에 가장 가깝게 풀이
충무공 정신은 '일심과 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