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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야 하루미투 씨(68세)는 잘 정돈된 그의 공방과 닮은꼴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몸가짐,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감춰진 단호함,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떼는 말투에는 강한 자부심과 고집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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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가라쿠리 3대 명인’ 중 한 명. 도시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나카 히사시게(1799~1881년)의 ‘차 나르는 인형’과 ‘구르는 인형’은 모두 그의 손을 통해 재현됐다. 다나카 히사시게의 원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 한야 하루미투 씨는 가라쿠리 장인 호소카와 한조가 1796년에 쓴 ‘가라쿠리 도휘’라는 책에 실린 도면 한 장을 연구해 3년 만에 ‘차 나르는 인형’을 복각해냈다.
원래 한야 하루미투 씨는 국가공무원이었다. “1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1쪽짜리 그림을 보게 된 거죠.” 그는 17~18세기에 꽃을 피웠던, 그러나 20세기에는 멈춰버린 기술에 대해 무한한 호기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잃어버린 전통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책임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가족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라쿠리에 매달렸고, 30년이 넘는 시간을 가라쿠리 장인으로 살아왔다.
한야 하루미투 씨가 ‘과학자’의 면모를 강하게 풍기는 가라쿠리 장인이라면, 요로즈야 니헤이 씨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했다. 상상력을 총동원해 주로 축제용 가라쿠리를 만드는데, 그의 작품은 프랑스·미국 등 외국에서도 인기 높다.
그는 “가라쿠리 장인 1세대들이 기술과 동작 등 과학적인 면에 치중했다면, 나 같은 2세대들은 장식과 분장 등 아름다움에 중점을 둔다”면서 “가라쿠리는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축제용 가라쿠리는 고장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간소하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표정·복장 등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제작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가마 형태의 산차(山車)라는 요로즈야 씨의 작품은 무려 10년이 걸렸고, 25억 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많은 전통문화 계승자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듯이, 일본의 가라쿠리 장인들도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한야 하루미투 씨는 후계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가라쿠리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은 몰라보게 높아졌지만, 아직 생활을 꾸려나가기엔 어려움이 많다”며 에둘러 대답했다. 요로즈야 씨 역시 “관심과 인식이 는 것에 만족한다”고 짧게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라쿠리가 없었다면, ‘산업강국 일본’은 없다”고 단언했다. 기술을 업신여기던 일본인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가라쿠리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기술이 산업화·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야 하루미투 씨는 “기술은 단계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라면서 “사람의 모습을 본뜬 가라쿠리 인형이 현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발전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로봇 강국 일본의 힘 '가라쿠리 인형'] ② 전통문화 부활시킨 장인들 <끝>
사이타마ㆍ아이치=류현아 기자
haryu@chosun.com
17세기 기술에 예술을 입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