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배 작가의 서울 이야기] 덕혜옹주와 덕수궁(상)
소년조선
기사입력 2009.12.10 09:51
  • 덕혜옹주는 고종이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딸입니다. 덕혜옹주를 60세에 얻었으니 고종은 손녀 같은 딸이 오죽 예뻤겠습니까. 그래서 옹주를 위해 덕수궁 즉조당에 황실 유치원을 만들었고, 네 사람이 메는 가마에 태워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1917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종은 모처럼 싱글벙글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덕수궁에 있는 황실 유치원에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허허, 고 녀석 참….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지….”

    고종은 유치원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덕혜옹주는 언제나 내 곁에 둬야겠어. 이 아이만은 빼앗기지 말아야지.’


  • 삽화=양동석
    ▲ 삽화=양동석
    고종은 이런 생각을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문득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은(영친왕)이가 유학 간다는 구실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지 벌써 10년이 되었구나. 그들은 어린 덕혜옹주마저 일본에 볼모로 데려가려고 하겠지? 그리고 일본 귀족과 정략결혼을 시키려 할 테고. 막아야 해.’

    고종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일제에 의해 ‘이태왕(李太王)’이라 불리며 비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시종 김황진을 불러 말했습니다.

    “일고여덟 살쯤 된 조카 하나를 장래 부마(임금의 사위)감으로 내놓아라.”

    김황진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대 조카와 약혼해 두고 적당한 시기에 발표하면 일본도 옹주를 볼모로 데려가진 못할 것 아니냐?”

    김황진은 고종의 부탁을 받아 조카 하나를 고종에게 소개했습니다. 고종은 그 아이를 덕수궁으로 데려오게 해 한밤중에 몰래 만났습니다.

    “나이에 비해 아주 의젓하구나. 남자답게 잘생겼어.”

    고종은 아이를 찬찬히 뜯어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아이를 먼저 그대의 양아들로 삼아라. 그런 다음 옹주와 약혼을 하는 거다. 서둘러야 한다.” ................................... <하편에 계속>


  • 눈 덮인 덕수궁.
    ▲ 눈 덮인 덕수궁.
    정릉동 행궁→경운궁→서궁→명례궁 그리고…
    비운의 황제 고종이 머물며 '덕수궁'이라 불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은 사적 제124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 궁궐이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이곳에 머물며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렀다.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여기서 즉위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광해군이 복구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이 궁을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비해 유폐시키면서 ‘서궁’이라 불리었고, 반정으로 뒤를 이은 인조는 ‘명례궁’이라 고쳐 불렀다. 그 후 270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1897년 고종이 이 궁을 거처로 정하면서 궁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은 순종이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올리면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등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고종이 덕수궁을 사용하면서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해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돌로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등 많은 건물을 세웠다. 덕수궁은 1933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해방 후에는 석조전 건물이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사용됐고, 현재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