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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4시경, 조선일보 미술관에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스님이 갑작스레 등장했다. 지난 22일부터 이곳에서 개인 전시중인 단색화 작가 김근태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다. 수불 스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져 미술관은 전시 폐막을 하루 앞두고 문전성시를 이뤘다.
불자(佛子)라면 잘 알겠지만, 수불 스님은 불교계에 큰 스님으로 통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트위터리언으로 현대인들과 SNS로 소통하는 혜민 스님이 힘들고 어려울 때나 수행이 막힐 때 찾는 이가 바로 수불 스님이다. 혜민 스님은 한 인터뷰에서 이 큰 스님을 자신의 멘토라고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수불 스님은 동국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평소 철학에 대한 조예가 남다르다. 스님 내면에 켜켜이 쌓인 철학은 종종 미술과 만난다. 이것이 불공하는 스님이 피카소, 이우환의 그림을 읽어낼 줄 알며, 낯선 작가의 작품에 마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불 스님과 김근태 작가의 연은 약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작가가 안국선원에서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을 배우면서 수불 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됐다. “참선 공부한다고 그렇게 애를 쓰더만, 그 깨달음을 미술에 다 쏟아놓았네” 수불 스님은 흐뭇한 미소로 미술관 내를 돌며 작품 하나하나를 천천히 돌아봤다. “3년 전, 이우환 선생에게 작품을 한번 선보였지. 실례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어. 한참을 보시더라고. 어지간하네, 기다려봐 라고 하셨지. 이 사람, 그림 그리는 과정은 보지 않았지만, 참선 공부하는 과정은 옆에서 내가 다 봤잖아. 그걸 다 봤는데 뭐, 그림은 안 봐도 뻔하지. 난 이 작가를 믿어”
의식의 동질감이라도 느낀 걸까. 선원에서 7년 동안 수행하며 함께 보낸 시간 탓일까. 스승과 제자는 함께 길을 걷다 같은 작품에서 발길이 멈췄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눈을 통해 보는 거지. 눈은 그냥 그림을 보게 하는 도구일 뿐이고 마음으로 보는 거야. 나는 그림을 그렇게 봐. 하얗게 칠해져 있지만 찢기고 뜯어진 자국에서 작가의 상처가 보여. 그래⋯. 뭐가 있구나, 그냥 그렇게만 생각해. 그건 작가의 비밀일 테지. 물어보면 안 되는 비밀. 그런데 나는 그런 상처 있는 그림보다 온통 백색에 아무 찢김이나 뜯김이 없는, 옆에 그림이 더 좋아 보이네. 그냥 나는 그렇다고.(웃음)” 제자는 스승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를 다 들켜버린 아이처럼 몸 둘 바를 몰랐다.
작가는 “스님을 만나고 나라는 사람이 욕망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7년간 참선을 하고 저도 달라지고, 작품도 많이 달라졌어요. 언뜻 보면 모양은 같은데 힘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죠. 달항아리는 텅 비어 있지만 비워냄으로써 쓸모가 있듯이, 제 그림도 형태는 더 없어졌는데 울림은 더 커졌어요”라며 나지막하게 고백했다. -
“위선을 많이 벗어던졌지. 작가는 작품에 자신을 입히는 것 같지만 아니야,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신을 벗기는 과정이야. 세상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자유로워졌어. 여전히 해체할 게 남아있기는 하지만 과정이겠지. 이념, 사상, 이데올로기⋯그것도 다 욕망이거든. 어느 틀에 갇혀 있는 어리석음, 그걸 벗어던지고 나면 잘 보일 테지. 세상이, 그리고 이 그림도.”
때마침 한 어린 아이가 작품 앞에서 소리쳤다. “엄마, 여기에 그림이 없어. 왜 아무것도 없어?” 수불 스님과 작가는 웃는다. “열 살 채 안돼 보이는데, 벌써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자리 잡힌 거야. 이 사람의 작품은 고정관념 없이 봐야 하는데⋯ 이걸 정말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 그림의 맛을 알려면 모두 참선해야 할걸” 곁에서 맴돌던 불자 일동이 웃었다.
수불 스님은 작가의 대표작인 순백의 작품 ‘적정(迹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세속적인 깨끗함과 엄연히 다른 청정’을 여러 번 이야기하던 스님의 가르침을 담아낸 듯한 그림이었을까. 영원을 희구하는 하나의 종교처럼 비워내고 또 비워낸 작가의 그림 한 점이 어지러운 세상살이 속에서 순백같은 평안을 갈구하는 또 다른 어떤 이와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수불 스님, 단색화 작가 김근태 개인전 찾아
-김근태 작가, 혜민 스님의 멘토 수불 스님과 7년 전 연 닿아
-수불 스님,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닌 그저 눈을 통해 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