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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예술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으로 명성을 떨친 한국인이 있다. 화가 이진우다. 1983년 세종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파리로 날아간 그는 30여 년 간 쉼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만해도 프랑스어가 서툴렀죠. 그래서 프랑스어가 되는 친구가 대신 데생 2점을 가지고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교수를 찾아갔어요. 교수가 찬찬히 살펴보더니 ‘잘 그렸다. 그런데 이 데생은 유러피언 스타일이다. 네 친구는 한국인인데 왜 유럽식 그림을 그렸냐. 그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냐’고 했답니다. 커다란 충격이었어요. 내가 한국인이라는 증거를 대야했죠. 부모가 한국인이니 한국인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그날부터 ‘나는 왜 한국인이지?’ ‘내가 한국인인 증거는 무엇이지?’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지?’ 끊임없는 물음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지역적인 것만으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며 “한국인과 외국인의 차이부터 살폈다”고 말했다. 그 첫 단추가 의식주였다. 무엇을 먹고 왜 먹고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자 전통, 학문과 철학, 역사, 풍토 등에 대한 정보들이 따라왔다. 자연스럽게 메주를 담가 된장찌개를 끓이고 찌개를 담는 뚝배기를 만들고 김치를 담그는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먹지? 왜 이런 그릇에 담지? 우리 문화의 근본을 찾아다니면서 점차 고민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한국인의 위대한 유산이자 한국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미술재료인 한지와 숯, 먹 등을 만나게 됐죠.” -
86년에는 한지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주까지 내려가 직접 닥나무를 불려 한지를 만드는 전통 방식을 배웠다. “전세계 누굴 만나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도 ‘한국의 종이를 따라올 수가 없다’라고 말하더라구요. 우리 토양에서 자란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재료부터 달라요. 프랑스에서 미술재료학만 7년을 공부했는데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재료가 우리 한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은 칠을 하고 덧붙이는 등의 것들과는 많이 다르다. 숯을 잘게 부숴 아크릴 바인더 용액과 섞고 다시 린넨 위에 바르는 것으로 작품의 기본 틀을 잡는다. 동시에 숯을 거칠게 부순 다음 크기가 각기 다른 체에 바쳐 걸러내는 작업을 한다. 숯 용액이 부어진 천위에 숯가루를 펴놓고 그 위에 한지를 덮은 다음, 긴 막대 형태의 쇠솔로 온 무게를 실어 두드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그 위에 다시 한지를 덮고 숯가루를 펴놓은 다음 두드리는 과정을 20여 회 가량 반복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순수 노동이라고 말한다. “진심을 다해 성심껏 만드는 거죠. 작가가 개입되지 않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 개인전의 작품명도 모두 무제죠. 제가 무엇을 정해서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제 진심을 느낄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예술 아닐까요.” -
그의 손을 보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다. 심지어 사진 촬영을 위해 어깨 위로 팔을 들어달라는 요청에도 팔이 자유롭게 올라가지 않아 한참을 애를 먹었다. 고된 작업이 남긴 상흔들이다. 손톱부터 마디, 손등과 양팔에 이르기까지 성한 곳이 없다. 그런 그의 고된 노동에 대해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강도 높은 노동이 가져다 준 상처들은 그의 단색화 작품이 다름 아닌 몸의 투사의 결과임을 말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성심을 다해 만든 작품들은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를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유럽 전시 중 그의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외국인 관람객의 모습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2006년 체코 프라하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한 체코 화가가 3시간 동안 ‘산’이라는 작품 앞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가 다가가 “왜 우느냐”고 묻자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냐. 당신의 마음과 당신이 오롯이 느껴진다”고 답했단다.
‘뉴욕타임즈’나 ‘르 피가로’ 같은 해외 일간지와 ‘가제트’를 비롯한 프랑스의 미술전문지들은 1세대 단색 화가를 이을 실력파 차세대 작가로 이진우를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을 단색화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무작위로 반복하는 노동 혹은 행위가 단색화 작가들의 행위와 흡사해 단색화의 한 종류로 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작위로 반복하는 노동을 그는 하루 18시간씩 해왔다.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하루 8시간을 꼬박 작업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든다고 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에요. 말보다 진심을 다하면 통하죠. 육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을 통해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감동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시에 오시면 그림 앞에 서 계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려고 하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작가의 무엇이 아닌 작품 그대로를 느끼다 가셨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비움과 채움’이다. 그는 고된 작업을 통해 자신을 완벽하게 낮추고 내려놓았다고 했다. 꼭 예술 작품이 아니어도 가을 하늘을 보며 사람들은 충만함을 느낀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아련한 추억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비움의 상태로 만든 작품을 바라보며 많은 분들이 살아있는 기쁨을 느끼고 충만함을 채워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이번 전시와 맞물려 프랑스의 대형 독립출판사 중 하나인 악트 쉬드 출판사에서는 그의 전문 서적(도록)을 발행했다. 이번 도록 발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반 고흐, 세잔느, 피카소, 프리다 칼로 등 당대 최고의 작가만을 선별해 서적으로 발행하는 출판사에서 한국인 화가로는 10년 전 이우환 이후 두 번째로 그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세르누치 박물관 마엘 벨렉(Mael Bellec) 학예실장은 “프랑스와 중국에서 인지도 높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고국인 한국에서 알려진 시기는 다소 늦은 편이긴 하다”며 “이번 조선에듀케이션과 세르누치 박물관의 공동 기획 전시를 통해 이진우의 최근 작품들을 고국의 국민들도 감상 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화가 이진우의 「이진우 展 ‘비움과 채움’」은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사업 중 하나로 19일부터 24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서울 중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2017년도 상반기에는 일본의 ‘도쿄 화랑’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프랑스를 매료시킨 화가 이진우의 투혼
- 뉴욕타임즈·르 피가로·가제트 등 해외 유수 언론이 주목한 화가
- 작품 보며 눈물 흘리는 작가들도 많아
- 19일부터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개인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