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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벨기에 겐트대에서 2016 국제철학올림피아드(IPO·International Philosophy Olympiad)가3박 4일간 열렸다. 40여 개 국가에서 대표로 뽑힌 고교생 90여 명이 참가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높은 시상대에 오른 이는 한국 대표 두 명과 터키 대표 한 명이다. IPO위원회에 따르면 한 국가에서 온 대표들이 동시에 금메달을 받은 것은 IPO가 진행된 24년 만에 처음이었다. 한국의 금메달 기록은 2012년(노르웨이 개최)에 이어 두 번째다. 이날 주인공 중 한 명인 청심국제고 3학년 김의영(18)양은 이미 학교에서 유명한 ‘철학 마니아’다. 그는 독서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철학적 궁금증을 풀어가고 있었다. IPO는 그 정점에서 일궈낸 성과다.
◇“왜 화장 안 해?” 질문받은 경험, 에세이로 풀어내
IPO는 참가자가 세 가지 제시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네 시간 동안 철학 에세이를 써 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중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작성해야 한다. 심사 기준은 사고력·설득력·창의력·표현력 등이다. 김의영양은 ‘One is not born, but rather becomes, a woman(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다)’이라는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 ‘제2의 성(性)’ 구절을 주제로 택해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영어로 써내려갔다. 김양은 ‘보부아르를 포함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여성에게 사회적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할 선택권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주변 환경 요인을 과소평가한 주장이다. 여성이 진정 자유로이 행동하기 위해선 사회가 먼저 그러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철학이라고 하면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선입견이 많다”며 “경험을 활용해 ‘논리’와 ‘문학’을 함께 녹여내려 했는데, 그 점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평소 ‘남자가 되고 싶냐?’ ‘언제쯤 여자답게 머리를 기를 거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어떤 남학생은 ‘너처럼 남자 같은 여자와는 아무도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어요.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예쁘다’ ‘여자에게 결혼은 중요하다’ 같은 사회적 관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머리에 박혀 있는지 알 수 있는 말이죠. 또 다른 남학생은 제게 ‘왜 화장을 안 하느냐’고 물어요. 이 말에는 ‘여자는 자신을 꾸며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관념이 깔려 있고요. 이처럼 여성에 대한 통념을 접하는 과정에서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는 소위 여성스러운 옷을 입지 않아요. 머리도 짧죠. 남자처럼 보이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제가 원하는 대로’ 주체적으로 입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에세이에 이런 경험을 철학적 요소와 함께 녹여내려 했습니다.”
◇“독서·온라인 수업·소논문 등 다양한 영역으로 관심 확장할 수 있어”
김양이 처음 철학에 흥미를 느낀 건 고등학교 윤리 수업 때였다.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왜 착하게 살아야 하나’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등 평소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틈틈이 철학책을 읽어 나갔다. ‘서양철학사’(버트런드 러셀)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철학 이야기’(윌 듀런트)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T.Z.레빈) ‘철학 VS 철학’(강신주) 등을 섭렵하며 기초를 쌓았다. ‘이방인’(알베르 카뮈) ‘구토’(장 폴 사르트르) 등을 필두로 니체·키르케고르·까뮈·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의 문학 작품도 읽었다. 그는 공부와 독서를 병행하려고 시간을 쪼개 쓰고 틈을 냈다. “중간·기말고사가 끝난 시점에 집중적으로 읽었고, 그 외에도 수행 평가로 아주 바쁠 때가 아니면 늘 책을 봤습니다. 많이 읽을 땐 일주일에 한 권 읽었어요. 적게는 두 달에 한 권 읽는 데 그칠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독서만으론 철학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고교 2학년 여름방학부터는 하버드대 온라인 철학 강의(www.extension.harvard.edu)를 수강했다. 영어를 이해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수업으로, 수업료는 강의당 1400달러선이다(등록비 50달러 별도). 김양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덕분에 언어 면에서 어렵지 않게 강의를 따라갈 수 있었다. 김양이 선택한 강의는 ‘철학의 이해(Introduction to Philosophy)’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 ‘경제 정의(Economic Justice)’다. “강의를 온라인으로 보고 관련 서적을 추가로 읽은 뒤 매주 온라인 토의에 참여했습니다. 존 롤스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적이 있지만 수업을 듣는 건 처음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정말 기가 막히게 설명을 잘해주셨어요. 총 세 번 에세이를 제출해 피드백을 받아야 했는데, 채점 기준이 고교보다 훨씬 엄격했습니다. 주제도 쉽지 않았어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중 무엇이 나은가’에 대해 쓸 땐 밤을 꼬박 새웠어요.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여성의 노동은 상품인가’에 대한 에세이도 제출했죠.” 세 편의 에세이는 모두 A학점을 기록했다. 그밖에 에드엑스(www.edx.org)와 코세라(www.coursera.org) 등에서 무료 철학 강의도 들었다. 그는 “해외 대학 온라인 수업에선 남다른 교육의 깊이와 질(質)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명확하게 글 쓰는 능력도 기를 수 있다”며 추천했다.
철학에 대한 생각을 소논문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지난해 ‘이타적 품성은 불편한 것인가’라는 소논문을 썼다. “사람들이 기부를 왜 하는지가 궁금해 이타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쓴 논문입니다. 아인 란드와 니체, 피터 싱어의 이타주의에 대한 주장을 각각 비교 분석한 뒤 제 생각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북한 이탈 주민 돕는 ‘아우름꽃’ 창업해 1200만원 기부
김양은 철학 수업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다각도로 생각하게 됐다. 그중에서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북한 이탈 주민의 한국 사회 적응 문제다. 이들을 돕기 위해 김양은 ‘아우름꽃’이라는 꽃 중개 사업체를 창업했다. 소비자와 꽃집을 연결해주고 중개 수수료를 받아, 북한이탈주민을 지원하는 NGO인 새조위(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에 기부하고 있다. 페이스북·네이버 블로그에 영상과 활동 상황을 올리고, 친척·새조위 관계자·각종 기업에 아우름꽃을 이용하도록 홍보했다. 그 결과 김양은 지난 3년간 새조위에 1200만원 넘는 금액을 기부했다. 고교생에게 적지 않은 돈이다. 지난해 받은 유관순횃불상 및 자랑스런 청소년 대상 상금도 내놨다. 그밖에 새조위의 2013·2014·2015년 연차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했고, 북한이탈주민의 남한과 북한에서의 생활을 알리는 ‘떠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번역 작업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북한 이탈 주민은 내가 사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이라며 “이후 인종과 여성 문제에까지 눈을 돌려 우리가 소외계층을 왜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김양은 “꿈은 ‘소설 쓰는 철학자’가 되는 것”이라며 “책과 강의를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대중과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국제철학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가 말하는 ‘비교과 활동 영역 넓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