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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적거리지 말고 옆 사람과 동작을 맞추세요." "시선은 손끝으로 향해야 합니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3일 오후 서울 태릉중학교. 이 학교 독서토론 동아리 '라온제나' 회원들은 수업이 없는데도 학교에 나와 뮤지컬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제2회 대한민국 창의체험 페스티벌'(11/15~17, 경기 고양 킨텍스) 출품 뮤지컬 '합체'의 막바지 연습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
지도 교사의 설명에 열심히 손발을 놀려가며 동작을 맞추던 아이들은 잠시 후 쉬는 시간이 되자 앞다퉈 한마디씩 꺼냈다. “선생님, 마지막 안무는 처음부터 같이 해요? 라인이 지저분한데...” “처음엔 앞줄만 하고 뒷줄은 두 번째 소절부터 합류하는 게 어떨까요?”
교사와 자연스레 둘러앉아 의견을 교환하며 공연 방향을 잡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논리적 근거를 대가며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는 모습, 주술 구조가 완벽하게 짜인 문장을 구사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연습에 지친 기색을 보일 법도 한데 얼굴 찌푸리는 학생 하나 없었다. 어느 그룹에나 있는 수동적 아이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 점 역시 신기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
◇동아리 활동, 건전한 또래문화 조성에 '딱'
라온제나는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의 지원을 받는 '사제동행 독서동아리'다. 라온제나는 '즐거운 나'란 뜻의 순우리말. 교과부는 올 4월부터 '학교폭력 근절과 주5일 수업제 연계 토요 프로그램'의 하나로 사제동행 독서동아리(중학생 대상) 750개를 지원해 오고 있다. 사제동행 독서동아리는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하는 다양한 독서 활동을 통해 소통과 공감, 자기표현 능력 계발 등 인성교육을 지향하고 동아리 활동으로 건전한 또래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진행 중인 프로그램. 독서토론 외에 △책 쓰기 △독서 캠페인 △작가와의 만남 △북 페스티벌 등 학생의 자발적 참여를 기반으로 다양한 독서 활동이 전개된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덕분에 역동적 활동이 많지만 사제동행 독서동아리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독서 토론'이다.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주제를 통해 토론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펴는 게 주된 활동. 그 과정을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우는 게 목적이다.
동아리 지도를 맡고 있는 신재경(국어) 교사는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다른 이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을 진행하다 보면 자기 의사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논리를 만들어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익히는 거죠."
그래서일까. 이날 만난 라온제나 회원 간 대화는 여느 중학생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대화 도중 서로에게 핀잔을 주는 일 따윈 찾아보기 어려웠고, 모두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 그에 대한 최선의 답변을 내놓았다. 자신과 같은 의견을 내놓은 친구에겐 적극적 동의 의사를 나타냈고, 말문이 막힌 친구가 있을 땐 그 친구가 말을 끝낼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
◇지도교사 헌신이 회원들 자율성 이끌어내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저절로 '토론의 고수'가 된 건 아니다. 처음 동아리가 결성됐을 때, 12명의 회원 중 독서토론 유경험자는 3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첫 번째 수업부터 난항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어색해서 말도 못 꺼냈어요. 제 성격이 원래 내성적인 편이거든요."(김채린·1년) "학기 초만 해도 채린이의 존재 자체를 몰랐어요. 요즘요? 동아리 모임 시간만 되면 채린이 목소리가 끊이질 않죠."(박성하·1년)
어색해하던 이들을 '토론의 장(場)'으로 끌어낸 주인공은 신재경 교사였다. 그는 "처음부터 어려운 정식 토론으로 학생들을 긴장시키지 말고 다양한 독서 관련 체험활동을 통해 독서나 토론에 대한 거부감부터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그는 회원들의 연령대를 고려해 틈 날 때마다 그 또래가 즐길 만한 체험 활동을 찾아다녔다.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는 지역 연계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스크랩했고, 다른 학교 도서관도 수시로 찾아가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독서 프로그램 중 성공 사례를 배웠다. 도서관 사서가 많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가입했다.
"라온제나 지도를 맡은 후 주 6일 근무가 일상화됐어요. 힘들 때도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 모습을 볼 때마다 힘이 납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학생이 아니라)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신 교사의 헌신은 라온제나 회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회원 조윤호(1년)군은 "매 수업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오시는 선생님 덕분에 동아리 활동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 구현태(1년)군은 "독서 동아리라고 해서 조용하게 책만 읽는 건 줄 알았는데 항상 시끌벅적해 재밌게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과도 있었다. 라온제나는 지난 8월 '서울시 청소년 토론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동아리가 결성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맞는 '경사'였다. 9월엔 전국 사제동행 독서경연대회에 참가, 전국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당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진 뮤지컬 '합체'는 100% 회원 간 회의를 통해 상연이 확정된 작품. 상금(50만원)은 전액 복지단체에 기부했다. 그 또한 전체 회의를 통해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사안이었다. -
◇독서토론, 잘만 하면 '전인교육'도 실현 가능
라온제나 회원들은 대한민국 창의체험 페스티벌을 끝낸 후 학교 인근 사회봉사기관에서 '공연 봉사'를 펼칠 계획이다. "동아리 활동의 성과를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에 쓰자"는 데 회원들끼리 합의했기 때문이다.
나혜정 교과부 창의인성교육과 연구사는 "라온제나는 사제동행 독서동아리제 기획 당시 목표로 삼았던 '인성교육과 건전한 또래문화 조성' 측면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모범 사례"라고 칭찬했다. 신재경 교사도 “독서토론 교육을 통해 회원들의 인격 형성과 창의성 계발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회원들의 자기 평가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김예지(1년)양은 라온제나를 '씨앗'에 비유했다. "라온제나 활동을 통해 생각의 씨앗, 배려의 씨앗, 경험의 씨앗을 심었다고 생각합니다. 1년 후면 이 씨앗이 쑥쑥 자라 절 비롯한 라온제나 친구들 마음속에 예쁜 꽃을 피우겠죠?"
독서 토론 6개월, 아이들이 달라졌다
김구용 조선에듀케이션 기자
kky902@chosun.com
-서울 태릉중 사제동행 독서 동아리 '라온제나'
-토론 과정 통해 배려심 익히고 인성도 계발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