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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N포 세대에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나 몰라 효과’(What the hell effect)예요. 다이어트 할 때 한입 먹고 나서 이성을 잃고 완전히 포기하다가 다 먹어버릴 때 있죠? 그것과 같은 것이에요. 청년들이 취업하려고 하다가 계속해서 실패하면 ‘아몰랑’하면서 다 놔 버리는 것도 이런 현상의 일종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하나에 실패하면 ‘나는 안돼’, ‘나 그만둬야 해’ 하면서 다 포기해버리는 거죠.”(곽금주 교수의 ‘흔들리는 20대: 청년심리학’ 강의 중 일부)
실패를 배우는 움직임이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명 ‘실패학’이다. 실패학이란, 청년들이 진저리쳤던 고난과 좌절을 헤치는 방법 등을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기존에는 성공에만 중점을 뒀던 대학 강의가 최근 실패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교양강의로 다가온 실패학
매학기 수강인원 200명을 넘길 정도로 서울대 인기 교양강의로 꼽히는 ‘흔들리는 20대: 청년심리학’은 이번 학기에 실패학을 첫 강부터 중점적으로 다룬다. 강의를 담당하는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헬조선(Hell 朝鮮)’, ‘N포 세대’, ‘수저 계급론’을 강의 서두에서 풀 계획이다. 곽 교수는 “2005년부터 강의를 해왔다. 당시에는 청년의 ▲사랑 ▲진로 ▲성취 ▲성공에 대해 다뤘지만, 2~3년 전부터 전반적으로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아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현상은 명실상부한 서울대 학생들도 마찬가지”라며 “요즘 사회에 무력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실패’를 첫 강부터 넣어 자세히 다룰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당 강의는 K-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를 통해서도 공개된 상태다.
서경대는 이번 학기에 실패학 강의를 교양강좌인 ‘핵심역량교양 필수교과’로 정했다. 강의를 맡은 윤영란 인성교양대학 교수는 “성공과 도전에 대한 강의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실패는 이제 막 입시 전쟁을 뚫고 나온 신입생에게는 아직 생소할 수 있다”며 “하지만 누구나 실패를 경험할 수 있으며 실패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일찍부터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커리큘럼을 살펴보면 ▲자기통제 ▲자기제어 ▲장애극복 방법 ▲진로를 찾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 걸러내는 법 등 문제해결 역량을 길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윤 교수는 “성공이 아닌 실패를 통해서도 자신감을 높이고 자존감을 길러낼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 강의의 목표”라고 귀띔했다.
경희대 사회학과에서도 이번 학기에 ‘실패학’과 밀접한 섹션 강의를 구성해 눈길을 끈다. 고강섭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학 특강’ 강의에서 3주 동안 ‘청년세대의 박탈과 소외’ 문제에 대해 별도 섹션을 마련했다. 수강생들은 청년세대의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박탈과 청년세대의 갈등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게 된다. 고 교수는 “최근 취업난 등으로 인해 청년들의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소외감과 박탈감도 동시에 상승했다”며 “당사자인 대학생들이 직접 해당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해결책을 찾는 방향으로 강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학’ 강의는 오프라인을 넘어 온라인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방송통신대 프라임칼리지에서는 ‘실패사례 분석을 통한 창업성공전략’ 강좌를 개설했다. 김창경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로, 창업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실패 사례를 통한 교훈을 알려주는 것이 골자다. ‘무엇이 불편한가? 무엇에 우리는 아파하나?’, ‘왜 망하는지도 모르는 나’ 등의 주제를 다룬다.◇대학가, 실패를 마주 보는 시도 더 많아질 것
실패학 강의를 신청한 수강생들은 현실과 다른 공허한 성공론에 답답함을 느낀 경우가 많다. ‘흔들리는 20대: 청년심리학’ 수업을 신청한 김희수(가명ㆍ서울대 사회과학대학 2학년)씨는 “어느 대학에서나 들을 수 있는 ‘성공 경험담’ 등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보다 공감이 많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라고 하면 ‘너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는 눈빛이 많아서 그간 부담을 많이 느꼈다”며 “그런 부담감이 오히려 자신감을 깎아내렸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누구나 실패를 할 수 있으며 실패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고 싶다”고 말했다.
김동수(서경대 경영학과 1학년)씨는 “그간 자기계발서의 흔한 성공이야기가 지겨웠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대학에서 성공은 많이 가르치지만, 실패를 배우는 경우는 흔치 않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성공하는 법이 아닌 실패를 극복하는 법이 아닐까요? 저를 먼저 챙기는 강의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어요.”
김상명(서경대 생활디자인학과 1학년)씨는 “교양필수라서 접하게 됐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도 신청했을 것”이라며 “강의를 통해 언제가 겪을 실패에 담대하게 대비하는 면역력을 키우고 싶다”고 이유를 밝혔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실패에 대한 강의가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윤 교수는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실패가 곧 좌절이며 끝이라는 선입견이 짙었다”며 “하지만 실패가 만연해진 지금 이 시기에는, 이런 선입견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곽 교수는 “경쟁이 심한 우리사회에서는 대학이 일방적인 지식교육에만 그쳐서는 안된다”며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게 할 줄 아는 맵핑(Mapping) 교육이 시행돼야 하는데, 실패학이 그런 시도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대학가에 번지는 ‘실패학’ 강의⋯‘N포 세대’ 청춘들의 공감을 사다
-서울대ㆍ경희대 등 새 학기 교양강의로 등장 ‘눈길’
-수강생들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얘기보다 체감하고 교훈 삼을 수 있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