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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민국을 세계 10대(大) 경제 강국으로 이끈 주인공 중 한 분을 소개할게요. 고(故) 정주영(鄭周永·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입니다. 올해는 고인이 타계(他界)한 지 20년이 되는 해예요. 1915년 강원 통천군 송정면 아산리(현재 북한 지역)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2001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20일 범(汎)현대 일가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옛 자택에 모여 고인을 추모했지요. 그룹 차원에서는 다음 달 2일까지 '청년 정주영, 시대를 통(通)하다'라는 주제로 현대차그룹 계동사옥 로비에서 사진전(展)을 연다고 해요. 행사장에는 고인의 집무실이 재현되고, 국내 최초로 독자 생산한 자동차인 '포니' 실제 차량과 포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콘셉트카도 함께 전시됩니다.
정주영, 대한민국 경제의 '시작'이 되다
정주영은 대한민국이 낳은 위대한 기업가이자 혁신가였어요. 강원도 산골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난 때문에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10대(代)를 보내던 어느 날 "가난을 이겨내겠다"며 인천으로 떠났어요. 정주영은 외국인과 해외 물자가 드나드는 부둣가에서 짐 나르는 일을 하며 세상을 배웠습니다.
열아홉 살 무렵 그는 쌀집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가게 주인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아 취업 3년 만인 1938년 쌀집을 인수해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직접 경영에 나서요. 청년 정주영이 처음으로 '사장'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사업 수완을 발휘한 정주영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이듬해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해 기업인으로 탈바꿈합니다. 1950년에는 두 회사를 합쳐 현대건설을 새로 만들고,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복구하는 데 이바지했어요.
1967년 정주영은 현대자동차를 설립합니다. 자동차의 설계·조립·생산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국내 최초 기업이었지요. 1973년에는 대형 유조선 등 다양한 선박을 만들기 위해 현대조선중공업을 세웠어요.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금융·유통 분야까지 진출합니다. 현대백화점·현대카드 등 이름에 '현대'가 들어간 기업 대부분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길이 닿았지요. 이를 모두 한데 묶어 '현대그룹'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북선이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외국 학자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경제에는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온 국민의 진취적인 기상, 개척 정신, 열정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주영'을 한마디로 정의(定義)하면 '도전'이라 할 수 있어요. 그가 남긴 말에서도 남다른 도전 정신이 드러나지요. 정주영은 '절대 긍정' '개척 정신'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갔습니다. 도전은 '기적'을 낳았어요. 1968년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를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거리 대비 가장 짧은 기간에 고속도로를 만든 기록이었죠.
1974년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는 동시에 선박까지 완성하는 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성과를 올렸어요. 여기서 그 유명한 '500원 지폐 한 장과 선박 수주' 일화가 등장합니다. 당시 500원짜리 지폐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어요. 조선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정주영은 공장 지을 돈을 빌리려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해운계 거물 '리바노스'를 찾아갑니다. 정주영은 500원 지폐를 보여 주며 그를 설득했지요.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 조상은 1500년대에 철갑선 전투함까지 만든 민족입니다." 리바노스는 조선소를 세울 자금을 빌려주고 유조선 2척을 지어 달라는 주문까지 합니다.
정주영은 1976년 순수 국산 자동차 1호인 '포니'를 생산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자동차 독자 모델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