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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뻘 선생님이 알려주니 머리에 '쏙쏙' 세대공감이 꽃피는 교실

2018/05/13 16:24:13

지난 12일 오전 서울 일성여자중고등학교. '열여섯살 선생님'과 '일흔일곱살 제자'가 영어 교과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멘토 탁지원(서울여중 3학년) 양과 멘티 임기순 할머니는 벌써 한 시간째 영어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임 할머니가 'present'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이놈은 어떻게 읽는 거냐"고 묻자, 탁 양은 "프리젠트, 선물이라는 뜻이에요"라고 답했다. 임 할머니가 "프리젠트는 선물, 프리젠트는 선물"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하자 탁 양은 "할머니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마포구 염리동 언덕배기에 있는 일성여중고는 어릴 적 배움의 기회를 놓친 할머니들이 한데 모여 공부하는 특별한 학교다. 재학생 평균 연령은 61세. 지난 4월부터는 근처 서울여중 학생들이 '멘토'로 나서 할머니들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 서울여중 학생 20명이 일성여중고 신입생 할머니 20명에게 일대일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준다.



◇주말에도 '열공'하는 할머니들…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오전 10시, 일성여중고 지하 1층 다목적 교실이 20명의 여중생과 20명의 할머니로 꽉 들어찼다. 서로 안부를 묻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럽게 교과서를 펼쳐 공부를 시작했다.

멘토링에 참여하는 멘티들의 나이대는 '막내' 장미라(56) 할머니부터 '최고참' 진정순(82)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할머니들이 일성여중고의 문을 두드리게 된 사연도 여러 가지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고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한 경우도 있고,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신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국민(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일을 하러 다녔어요. 평생 '나는 공부하고 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지난해 겨우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어요. 가슴이 벅차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올해 중학생이 됐는데, 손녀 같은 학생들하고 오순도순 책상에 앉아서 공부한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김희자(68) 할머니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김 할머니가 펼쳐보인 연습장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눌러쓴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멘토 황서진(3학년) 양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황 양은 "할머니께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30년 동안 일군 식당도 아들에게 물려줬다고 하셨다. 영어 단어 하나만 가르쳐 드려도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책임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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