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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장인을 만나다] ② 전통 수작업 고수하는 대장장이 박경원 씨

2017/10/16 15:34:32

수작업으로 물건 만드는 전통 대장간

"기계를 들여놓으면 일하기 훨씬 수월하죠. 말해 뭐해. 힘도 덜 들고 물건도 많이 만들고 말이에요. 그런데 대장간이 물건을 착착 찍어내는 공장은 아니잖소?"

불광대장간의 주인 박경원씨는 기계 없이 손으로만 물건을 만드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지난 2014년에는 이러한 전통 대장간의 역사성과 희소성을 인정받아 불광대장간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두 평 남짓의 좁은 대장간 안은 두세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찼다. 한쪽 벽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덕 불씨는 대장간에 열기를 더했다. 대장간 내부에는 새것이 없다. 작업할 때 주로 쓰는 쇠망치와 강철 집게는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됐다. 화덕 앞에 자리 잡은 모루(받침으로 쓰는 쇳덩이)는 40년이 훌쩍 넘었다.

박씨는 쇠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만든다. 농사일에 쓰이는 호미와 낫부터 손도끼, 망치, 부엌칼, 작두 등 종류만도 100여 가지에 이른다. 몇 해 전부터는 캠핑이 유행하면서 캠핑용 도끼와 칼도 만들고 있다. 모든 일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다 보니 하루에 만들 수 있는 물건 수는 20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 손을 거쳐 만들어야 오래 쓸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린다.

대조동에 자리 잡은 지 반세기… 단골들 전국서 발길

박경원씨가 대장간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다. 피란길에서 미군의 배급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던 열세 살 소년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망치를 잡았다. 국수 한 그릇 얻어먹는 조건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웠던 일은 그의 평생 직업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갔지만 먹고살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 대장간 일을 했지요. 그땐 가게가 없었으니까 손수레에 도구를 싣고 다니면서 철물을 만들어 팔았죠."

대조동에 자리 잡은 건 1971년. 남다른 손재주가 있었던 그의 기술은 금세 입소문 났다. 지금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손님들이 찾아온다.

"한번은 어떤 손님이 찾아와 물건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요. 자기 아버지 댁에 수십 년 된 도끼가 있는데, 그게 우리 물건이었던 거죠. 여기서 만든 물건에는 모두 손자루에 '불광'이라고 인두로 표시해두거든요."

물건마다 새겨놓은 '불광'이라는 이름은 그의 자부심이자 자랑이다.

◇"아들과 함께 힘닿는 데까지 일하고 싶어"

그의 곁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 아들 상범(48)씨다. 대장간은 작업 특성상 항상 '2인 1조'로 움직인다. 한 명이 쇠뭉치를 잡으면 나머지 한 명이 망치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화덕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꺼내 모루로 옮겨 자세를 취하면 아들이 쇠망치로 내려치기를 반복한다. 작업 중에는 서로 말이 없다. 작은 손짓만으로도 둘의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옛날에는 한동네에 대장간이 한두 곳은 꼭 있었어요. 신촌 쪽에도 대장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어요. 저는 아들 덕에 다행히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으니 행복한 거죠."

평생을 불 앞에서 씨름한 대장장이의 꿈은 소박했다. 살아있는 동안 대장간에 나와 일하고 싶다는 것. 인터뷰가 끝나자 잠시 꺼뒀던 라디오를 켜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대장간 한쪽에 놓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러 교향곡이 망치질 소리와 묘하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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