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시작된 입양의 역사"춥고 배고파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거리는 난리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하루아침에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전쟁고아 중에서는 '혼혈아'도 많았다. 전쟁에 참가한 외국 군인과 우리나라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피부색과 눈동자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
정부는 전쟁고아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외 입양을 추진했고 1953년 혼혈 아동 4명을 미국으로 보냈다. 한국 어린이 최초 공식 입양이었다. 이후 1970년까지 17년간 1만999명의 어린이가 외국으로 입양됐다.
1970년대 들어서며 문제가 생겼다. 국외 입양아 수가 지나치게 늘면서 한국이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이다. 최고점을 찍은 1985년에는 한 해에만 무려 8837명이 해외로 입양됐다.
이에 정부는 국외 입양을 억제하고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그 결과 국외 입양아 수가 꾸준히 감소해 2015년에는 374명으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