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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악에 연극적 요소 더해 재밌는 공연으로 재창조… "궁중 음악, 많은 사람 즐겨야 명맥 이어나갈 수 있죠"

2016/04/27 16:07:00

◇힘들었던 어린 시절… 피리에 위로받다

정악은 궁중의 제례나 연회, 왕의 행차에 사용되던 의식 음악이다. 느리고 장엄하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1897년 조선이 문을 닫고 대한제국 시대가 열리면서 궁중 음악은 위기를 맞았다. 일제시대에는 '이왕직 아악부'가 근근이 맥을 유지했고, 1954년 최초의 국악 교육기관인 '국악사 양성소(지금의 국립국악고등학교)'가 생기면서 고비를 넘겼다.

정재국 선생은 만 열네 살이던 1956년 국악사 양성소에 입학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어요. 그러다 국악사 양성소라는 곳에서 국비 장학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학비 안 받고 공부를 거저 가르쳐준다는 말에 국악이 뭔지도 모르고 지원했어요."

국악사 양성소에는 조선 궁중 음악의 마지막 후예인 이왕직 아악부 출신 스승들이 포진해 있었다. 정재국 선생은 그들에게 6년간 성악, 기악, 무용, 이론 등 국악의 모든 장르를 전수받았다. 궁중 음악 위주였지만 산조, 판소리, 잡가 등 민속악도 배웠다. 운명과도 같은 '피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선생님이 수돗가에 앉아 피리를 부는 소리가 들리곤 했어요. 그 소리가 어찌나 좋은지 마음이 끌렸어요. 어린 시절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꼭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밤낮으로 피리를 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배들도 못 따라올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제대 직후인 1966년 피리 연주자로 국립국악원 정악단에 입단했다. 스승인 김준현 명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정악단의 리더 격인 '목(目)피리'에 올라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를 지낸 10년을 빼면 40년 세월을 국립국악원에서 보냈어요. 음악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죠."

◇궁중 음악 매력을 전 세계에 알리다

궁중 음악은 기본적으로 합주 음악이다. 정재국 선생은 197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피리 독주회를 열어 이런 고정관념을 깼다. 정악단 단원들과 함께 해외 공연에도 나섰다. 그는 "유럽에 최초로 국악을 알린 1973년 독일 베를린 예술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수제천'같이 박자가 가장 느린 곡들만 골라 연주했는데 반응이 대단했어요. 독일이 떠들썩했죠. 이어서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도 20일간 장기 공연을 했어요. 매일 1000명 이상의 관객이 우리 공연을 보러 왔어요."

정재국 선생은 199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대취타 보유자로 지정됐다. 궁중 음악의 하나인 대취타는 임금님 행차나 군대 행진 때 연주되던 음악이다. "1961년 국군의 날 기념 가장 행렬에 대취타가 재현되면서 고 3이던 내가 참여하게 됐어요. 최인서 선생님께 태평소, 용고, 나발, 나각, 징 등 대취타 연주를 배웠어요. 1972년 대취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전수생으로 5년간 공부했고 1978년에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유일한 계승자가 됐죠."

1998년 피리정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되면서 정재국 선생은 피리정악과 대취타 두 종목을 한꺼번에 보유하게 됐다. "처음 정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연주자가 10명 남짓이었는데 지금은 170명이 넘어요. 모두 내가 키워낸 제자들이죠. 이제 맥이 끊길 염려는 없겠죠(웃음)."

◇'재미있는 정악'으로 전석 매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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