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혼례를 올리는데
"때는 조선 시대였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가고 또 몇십 년이 지난 뒤쯤 되겠다. 어느 마을에 한씨 성을 가진 처녀가 살았어. 바느질도 잘하고 음식도 잘 만들고 어른들도 잘 모시는, 조선 시대로 치면 딱 훌륭한 신붓감이었지." 훌륭한 신붓감이라는 말에 관심이 확 쏠린 허영심은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영심은 한복을 차려입고 단정히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이 된 한씨 처녀는 곧 혼례를 올리기로 돼 있었어."
왕수재가 정색을 하고 "열다섯이 무슨 처녀예요? 청소년이죠!" 했다. "아냐, 그땐 청소년기가 따로 없어서 어린아이 시절을 넘어서면 바로 어른의 몫을 해내야 했거든. 남자는 열다섯, 여자는 열네 살이면 혼인을 하기 시작했지. 한씨 처녀는 먼 고을의 양반집 도령과 혼례를 올리게 됐어.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해 온 집안이었지. 혼례식 전날, 신랑 집에서는 혼인을 증명하는 혼서(婚書)와 신부에게 주는 비단, 그리고 장신구가 든 함을 보내왔어. 신부는 이 혼서를 평생토록 간직해야 했고, 죽은 뒤 관 속에까지 가지고 가기도 했어. 드디어 혼례식 날, 신랑의 말 탄 행렬이 처녀의 집에 도착했어. 신랑은 나무로 만든 기러기 인형을 조심스레 상 위에 올려놓았어. 평생 사이좋게 함께 살자는 의미였지. 한씨 처녀는 혼례복인 삼회장 저고리에 청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어. 머리에는 족두리를 얹고, 볼에는 잡귀신들을 물리치는 붉은색 연지 곤지를 찍었지. 처녀는 신랑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방을 나섰어."
이때 갑자기 장하다가 "에에?" 하며 이야기를 끊었다. "그럼 지금 신랑 신부가 얼굴도 모르고 결혼하는 거예요?"
"응, 양반가에서는 철저히 집안 어른들끼리 혼례를 성사시켰어. 혼례는 두 사람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집안끼리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한씨 처녀는 신랑 얼굴이 궁금한 것을 꾹 참고 고개를 숙인 채 혼례를 치렀어. 신랑, 신부는 손을 깨끗이 씻고, 맞절을 하고,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주고받았지. 곧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선언이 울려 퍼지자, 처녀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어.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던 거야. 사람들은 잡귀들이 싫어한다는 팥과 쌀을 한 줌씩 던져 주며 나쁜 일 없이 잘 살라고 축복을 해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