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 신세계를 여는 열쇠
지난 26일 오후 9시쯤.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의 한 모퉁이를 돌자 불을 환하게 밝힌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75㎡(약 22.6평) 크기 안채에는 수강생 20여명이 앞뒤로 놓인 긴 책상 8개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암기하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잠시 후 치러지는 도덕경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윽고 건명원 원장 최진석(서강대 철학) 교수가 시험지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시험지는 A4용지 4장 분량. 도덕경 1~8장에서 무작위로 발췌한 단락의 빈칸을 채우는 문제가 출제됐다.
서울대에 재학 중인 송승근(25)씨는 "한문 암기 시험을 4주째 보는데 볼 때마다 어렵고 외울 때마다 힘들다"며 "이번에도 완벽하게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몇 자 틀렸다.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건명원이 암기식 학습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암기야말로 사람을 진정한 배움의 경지로 이끄는 소중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덕경과 동양철학을 강의하는 최진석 교수는 암기를 "의미의 무늬(文)를 뇌에 새기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시 100편을 그냥 읽고 잊어버리는 것보다 10편을 완전히 외우는 게 훨씬 가치 있다"며 "읽기·말하기·쓰기를 반복하면서 완전히 육화(肉化)된 텍스트는 핵무기와 같은 위력으로 인생을 바꾼다"고 말했다.
서양 고전과 종교학 강의를 맡은 배철현(서울대 종교학) 교수는 "나는 라틴어라는 망치로 학생들의 머리를 때리는 사람"이라며 "고대 언어를 암기해 그 언어를 사용하던 고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사유의 지평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창의성은 훈련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술 작품 속에서 진리 또는 비(非)진리의 출현을 기술(記述)해볼 수 있는가?"
이날 1교시에 '예술, 삶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번데기'라는 주제로 강의한 서동욱(서강대 철학) 교수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수강생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 교수는 "흔히 창의성을 선천적 재능으로 여기지만 창의성은 후천적으로 훈련할 수 있고, 또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했다.
건명원 교수진은 훈련 원칙으로 ①익숙하지 않은 질문 던지기 ②이질적인 요소들을 충돌시키기 ③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어렵거나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하기 등을 제시했다. 동양철학-뇌과학, 물리학-서양사학, 종교학-건축학 등 완전히 이질적인 학문을 짝지어 구성된 수업 시간표, 방대한 양의 고전 암기 역시 이러한 훈련 원칙에 따른 것이다.
처음 수강생들은 '너무 어렵다' '양이 비인간적으로 많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나자 이렇게 혹독한 '창의성 훈련'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대학원생 최지범(25)씨는 "키케로의 라틴어 텍스트를 소리 내 읽으면서 정말 로마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며 "번역본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박승헌(23)씨는 "고전을 암기하고 평소 익숙하지 않았던 지식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누구인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