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는 충남 연산중학교 1학년 때 펜싱부 선배들이 쓰고 있던 마스크에 매료돼 처음으로 칼을 잡았다. 이후 그는 대전 충남기계공고와 대전대를 졸업하면서 착실히 기본기를 다졌고 1995년 국군체육부대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며 국내 무대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국내 무대를 석권한 그였지만 세계무대의 벽은 높기만 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한 김영호는 8강전에서 금메달리스트인 이탈리아의 푸치니에게 한 포인트 차로 역전패를 당해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김영호는 1997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따며 세계강호로 성장했다. 기쁨도 잠시.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직후 폐가 5㎝가량 찢어지는 중상을 입고 대수술을 받은 김영호는 7개월이나 검을 놓는 시련을 겪었다. 엄청난 재활훈련 끝에 돌아온 그는 1999 세계선수권 3위에 이어 1999 오스트리아, 1999 이란국제대회, 2000 대우그랑프리를 석권하며 강력한 메달권 후보로 지목됐다. 재기에 성공한 김영호는 국제무대에서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던 중국의 왕하이빈과 세르게이 골루비츠키(우크라이나)를 연달아 격파해 시드니올림픽 우승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2000 시드니올림픽 본선, 김영호는 뛰어난 순발력을 바탕으로 상대방 뒷편 어깨를 찍어버리는 주특기를 십분 활용해 세르히 홀루비츠키, 드미트리 셰브첸코, 랄프 비스도어프를 차례로 꺾으며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