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평등·박애를 추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기본 정서에 다 묻혀버렸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좌파 진영 사람들은 민족주의 정서에 거슬리는 얘기를 하면 감정적으로 확 반발하지만 진보의 가치와 진보적 정책에 대해 서로 이견이 있을 때는 그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것은 피끓는 민족주의이고, 머릿속에 진보의 가치가 약간 있는 정도죠.”
그의 좌파 진영 비판은 공자가 인의 길로 제시한 예(禮)와 악(樂)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예는 인간관계에서 최선의 거리를 유지케 하는 수단이다. 인간들이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정해 놓은 규칙과 행동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또 악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수단이다. 이러한 예악은 사(士), 지금의 지식인들에게는 더 없이 필요한 덕목이다.
“예가 없으면 사람끼리의 최선의 거리가 무너지고 너무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소인(小人)들의 분열상을 보이는 것이죠. 제가 경험한 진보좌파 운동에서도 예와 악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열상이 반복됐죠. 내가 잘났고 똑똑하다는 의식들만 있었습니다.”
‘북촌학당’에서 세월을 낚고 있는 그는 공자가 결국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할까. 이와 관련 그는 공자의 주장은 이상적이었지만 행동은 현실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천하의 패권을 다투기 시작한 전쟁의 시대에 더불어 살고 세금을 낮추라는 이상적인 주장을 폈지만, 권력을 잡아 뭔가를 해보고 싶어했고, 실제 많은 제자를 벼슬길에 넣었다. 그는 “공자의 제자들은 원만한 대인관계 등 조직생활에 잘 적응하고 훈련받은 사람들”이라며 “공자가 강조한 군자(君子)도 결국은 조직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예악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서로 뭉쳐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간 공자의 제자들은 한나라에 이르면 유교를 강령으로 하는 집권세력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좌파 논어’에서 이렇게 썼다. ‘공자는 흔히 정치가로서 실패하고 선생님, 교사로서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공자는 자기 개인이 권력을 잡지는 못했지만, 당(黨)을 만드는 데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평생 당(黨)을 만들고자 동분서주했지만 실패하였으니, 이제라도 그에게 무언가를 배워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논어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은 또 한 명의 좌파 지식인이 있다. 1988년 인천 5·3 사태 당시 주동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이우재(57) 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집행국장. 그 역시 방황과 좌절의 시기에 논어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인천에서 학당을 열고 논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논어를 새롭게 만난 때는 1992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국내 운동권도 속절없이 내려앉던 시기였다. 당시 운동권 동지들 중 상당수는 정치로 떠나고 일부는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에서 새 길을 찾았지만 그는 세상에 대한 화를 삭이지 못하며 술로 날을 지샜다.
“내가 이끌던 조직을 해산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였습니다.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논어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죠. 그때 논어 첫 장인 학이편(學而篇) 세 번째 구절이 머리를 쳤습니다. ‘인부지이(人不知而) 불온(不溫)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 아닌가)’라니? 공자가 나보다 위대한 사람이 분명한데 그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를 이겨내고 성인이 됐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상갓집 개 소리를 듣고 밥도 쫄쫄 굶어보고 온갖 수모를 겪었는데도 말이죠. 그러자 공자의 반도 안 되는 인간이 왜 세상에 앙앙불락하는가라는 부끄러움이 들었죠. 결국 이건 내가 나를 잡아먹는 게 아닌가, 결국 이게 자학이라고 생각하자 다른 건 몰라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군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논어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 20일 서울 광화문의 커피숍에서 만나 이런 경험을 들려주던 그에게 전날 만난 주대환 대표가 논어를 접한 얘기를 전해주자 “논어는 진짜 인생이 꽉 막혔을 때 도움이 되는 고전”이라며 주 대표 말에 동의했다. 논어를 읽다 보면 갑자기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며 막힌 게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논어는 그의 삶의 태도도 변화시켰다. 수틀리면 술자리도 바로 뒤집어버리던 사나움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논어를 3~4년 읽자 주변에서 내가 바뀌었다고 해요. 지금은 마음에 안 들어도 성질도 안 내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갑니다. 일진이 사납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가버려요. 논어를 읽기 전에는 눈도 찢어진 게 사납고 독한 기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다네요.”
이후 그가 논어를 제대로 읽은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논어를 8년간 읽고 2000년 ‘논어 읽기’(21세기북스)라는 책을 내놓았다. 원고지 2800매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저다. 주희의 ‘논어집주’ 등 온갖 고전적인 논어 주석을 인용하며 원문 번역에 충실하고자 애썼고 거기에 나름의 해석까지 가미했다. 그의 논어 읽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작년 말에는 ‘논어 읽기’ 증보판을 내놓았다. 이건 20년 이상 논어를 읽은 결과물로 “주석에 덜 휘둘리며 내 의견을 더 넣었다”고 한다. “논어는 나이가 먹을수록 이해가 되는 책입니다. 젊을 때는 그 나이만큼만 보이고 이해가 잘 되지 않다가 계속 읽으면 어느 순간 새롭게 이해되며 해석이 가미됩니다. 주희도 말년에 새롭게 터득한 내용을 가미하며 논어집주를 계속 고쳐나갔습니다.”
작년 증보판에서 새로움이 더해진 대목은, 예컨대 논어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해석이 까다로운 안연편(顔淵篇)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란 구절이다. “기존 주석에서 이 구절 해석의 방점은 극기(사욕을 버리고 내 입장이나 주장만 관철시키지 말라는 의미)와 위인(인을 이룬다)에 있었습니다. 복례는 대부분 주석에서 대충 지나쳐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첫 책에서 나는 예(禮)를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분수를 알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복례를 조화로운 사회적 분업 관계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봤죠. 하지만 이번 증보판에서는 예를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남녀, 노소, 귀천과 같은 사람 사이의 다름과 차별성이라고 봤죠. 이와 대비하면 인(仁)은 같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의미이죠. 그럼 어떻게 다름이 같음이 될까요? 사람을 그때그때의 사회적 관계에 맞게 제대로 대해주면서 차별성과 특수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20년 넘게 지속된 그의 논어 읽기는 그를 아예 훈장의 삶으로 인도했다. 그는 지금까지 논어를 20번 정도 가르쳤다. 일주일에 한 번, 열 달씩 걸려 처음부터 끝까지 논어 강독을 한 것이 20차례에 이른다는 것이다. 논어를 가르치는 훈장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강의를 하다가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아예 서당까지 차렸다. 고향인 인천의 한 오피스텔에 2009년 ‘온고제(溫故齊)’라는 서당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서 동양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인터넷과 시민단체 등에서 그의 강의를 알고 찾아와 고전을 배운 제자들이 지금까지 70~80명가량 된다.
그는 사람들이 온고제를 찾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사이보그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논리만 정교해졌을 뿐이지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죠. 고전은 왜 왔는지 모르지만 어디론가 끌려가는 한 번밖에 없는 이 소중한 삶을 스스로 내 의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돈과 명예가 사는 삶이 아니라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게 고전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몇 년 전부터는 공자를 넘어 맹자로 나아갔다. 수년간 읽어나간 맹자도 2012년 ‘맹자 읽기’(21세기북스)라는 책으로 정리돼 나왔다. ‘논어 읽기’보다 더 두꺼운 9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주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에도시대의 유학자) 등 다양한 주석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맹자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논어는 운문이고 읽을수록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많지만 맹자는 산문이고 명확하다”며 “‘맹자 읽기’는 ‘논어 읽기’보다 증보판이 나올 가능성은 적을 것”이라고 했다. “예컨대 공자는 사람이 성선(性善)에 가깝다고는 봤지만 성선이라고 못 박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맹자는 분명히 성선이라고 못 박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요순(堯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이런 성선설을 통해 우리가 완벽한 사회를 만들 능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에 따르면 공자와 맹자는 내세우는 핵심 개념도 좀 다르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강조했지만 맹자는 인과 의(義)를 앞세운다. 이는 두 사람이 처한 시대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주(周)라는 국가가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자는 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례를 복구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맹자의 전국시대 때는 이미 주는 붕괴되었습니다. 맹자는 인의의 정치를 펼쳐 혼란을 빨리 끝내고 누군가 천하를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맹의 도(道)를 천착하고 있지만 그 역시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에 자연스레 빠져들었다. 유신 시절인 1978년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1988년에는 5·3 사태로 모두 세 번 구속되며 골수 운동권의 삶을 살았다.
“지금은 뒷방(노동당 지도위원이자 고문)에 앉아 후배들 밥이나 사주는 처지지만 아직도 신념과 열정이 남아있다”고 한다. “체제를 선택하라고 하면 현실적으로 난감한 문제는 있지만 사회주의는 추구할 가치는 된다고 봅니다. 빵을 똑같이 나눠 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기계적 사회주의와 일당독재 등 소련과 중국이 실패한 원인을 찾아서 보완해 가져가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적어도 지금의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는 답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그에게 공맹의 도는 어떻게 해석될까. 그는 공자와 맹자를 자신들이 살던 시대상황에서는 위험한 주장을 편 혁명적 지식인으로 본다. “논어 계씨편(季氏篇)에 보면 ‘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가난한 걸 근심하지 않고 균등하지 못한 걸 근심하며 인구가 적은 걸 근심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는 걸 근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빵을 키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눠 주는 게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공자는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토지가 사유화되고 부가 특정 세력에 집중되며 벌어지는 부작용을 심각하게 봤습니다. 때문에 이(利)를 미워하며 사람끼리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겁니다.”
공자의 인(仁)도 결국 ‘보듬고 함께 살자’ ‘서로 사랑하자’는 표현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더 심각한 뜻이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공자는 인을 이루는 방법을 서(恕)라고 했고, 그걸 기소불욕(其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는 구절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맞아봐서 아프면 남도 때리지 말라는 것으로, 이건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혁명적인 주장입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요즘 공자의 핵심 사상이 인(仁)이 아닌 학(學)에 있다는 생각도 한다고 했다. 배움을 통해 누구나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주장이야말로 공자 사상의 핵심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그는 “논어의 시작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이고, 자신이 성인이나 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배우는 사람(學人)이라는 건 인정하는 공자의 태도를 보면 학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보다 더 위험한 주장을 편다. “맹자는 역성혁명을 일으킨 탕왕이나 무왕을 칭찬했습니다. 인의(仁義)를 해쳐 역성혁명의 대상이 된 권력자는 왕이 아니라 한 사내(一夫)에 불과하다고 했죠. 한 사내를 시해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섬뜩한 얘기로, 명나라 때 맹자가 금서가 된 이유입니다.”
그는 “맹자에는 현대적으로 음미할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맹자에는 주권 행사라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民主)는 없지만 민본(民本)과 민권(民權) 의식은 들어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성을 먹여살리는 것, 생업을 만들어주는 것(制民之産)이 정치의 제1과제라는 가르침은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하고 비정규직이 넘치는 현실에서 음미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보며 국민 모두가 아파하고 우는 것을 보면 맹자가 명확히 얘기한 성선설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맞는 것 같다”며 “2500년 전의 공맹의 얘기가 모든 답을 줄 순 없지만 적어도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맹은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