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5 16:23:35
국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됐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급기야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광무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내용을 담은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켜 독립전쟁에 나서겠다고 다짐합니다.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한국인이 모여 있는 마을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했고, 약 300명 규모의 부대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1908년 6월과 7월, 제1·2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함경북도에서 전개된 이 전투에서 안중근과 의병부대는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는 과정에서 의병부대원의 오해를 샀고, 의병부대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맙니다. 다시 의병부대를 조직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적당한 때를 기다려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며 피로써 맹세합니다. 바로 '단지동맹'입니다.
◇안중근의 사람들
안중근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칠 수 있었던 건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영향이 컸습니다. 진사(進士)의 벼슬에 있었던 안태훈은 '정의'를 가훈으로 삼아 의리를 중요시했습니다. 또 주변 사람을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지녀 늘 따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안중근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훗날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의 면모는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 안중근에게 쓴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이후 감옥에 갇혀 부당한 재판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을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혹여 가족들로 인해 아들의 결심이 흔들릴까 싶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오늘,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의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