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에 천재 예술가로 명성 떨쳐
1500년대 초반, 미켈란젤로는 유럽 전역에 천재 예술가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당시 그와 견주던 예술가가 바로 르네상스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입니다. 이 중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연이 정말 독특한데요. 두 천재 화가가 공동으로 작업을 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1504년 피렌체 정부는 두 천재 화가에게 프레스코화를 부탁합니다. 이에 다빈치는 '앙기아리의 전투'의 구상에 착수했고,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맡아 준비했지만 둘 다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군요.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창작 활동에 집중합니다. 1508년에는 걸작의 제작에 착수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바로 로마 시스티나 성당
<사진②>의 둥근 천장에 있는 '천지창조' '신과 인간의 관계' '신의 은총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의 모습' 등으로 이루어진 아홉 점의 천장화입니다. 이 천장화는 다양한 성경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묘사해 당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534년에는 시스티나 성당의 안쪽 벽에 대형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6년간의 작업 끝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답니다.
◇후대 예술에 커다란 영향 끼친 거장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나이가 들어서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때로는 조각가로,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토목기사와 건축가로 밤낮없이 일했어요. 그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
<사진③>'를 조각하고 있었어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산 피에트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수차례나 거듭했다고 해요. 예술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하죠?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8일, 숨을 거뒀어요. 마지막 작품이던 '론다니니 피에타'를 뒤로하고 말이에요. 그는 로마의 성 아포스톨리 교회에서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플로렌스로 가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됐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생전에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여겼어요. 가장 유명한 작품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자신은 평생 대리석 조각에 몰두했으며 단지 일정 기간만 다른 분야의 예술작업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조각뿐 아니라 회화, 건축 각 분야에 걸쳐서 르네상스 고전주의 완성에 기여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거의 500점에 이르는 데생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동시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