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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생 수학 전쟁...“하지만 선행학습 효과는 단지 이 때까지 뿐”이라는데...

2014/01/31 14:18:14

교과부에서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재미있는 수학교육으로 개선하겠다며 ‘통합교과형 수학’으로 개편했는데, 이것이 수학 사교육 시장의 불씨를 댕겼다. 여기에 “영어만으로는 차별화가 안 된다. 수학에서 결판 난다”며 특목고 지망생들이 수학 선행에 목숨 걸면서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수학 선행학습 열풍을 타고 수학 전문학원들의 사세 확장 속도가 무섭다. 과거 수학학원은 단과반으로 운영되거나 과외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점점 대형화, 세분화되는 추세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 수학전문 A학원은 빌딩 두 채를 통째로 쓰고 있다.

5층짜리 건물은 초등관, 8층짜리 건물은 중고등관이다. 목동뿐 아니라 전국 30여개의 분원을 거느리고 있는 이 학원은 최근 분당, 용인, 동탄 등 5개의 분원을 새롭게 열었다. ‘서울대 출신 강사’를 내세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B수학학원은 설립 2년 만에 분원을 열었고, 학부모들이 ‘최고의 초등 선행수학 전문학원’으로 꼽는 대치동의 C학원 역시 반포동에 분원을 냈다.

기자는 지난 1월 10일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목동 A학원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학부모인데 상담받고 싶다”고 하자 상담실 교사는 두툼한 학원 프로그램 전단지를 펼쳐 보였다. 전단지에는 교과 정규 과정, 경시반, 올림피아드반, 영재교육원 대비 프로그램 등 세분화된 수학 강의 시간표가 있었다. 상담교사의 말이다.

“예비 4학년 과정에 초5, 초6 과정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선행이 되는 거다. 선행을 하면 뭐가 다른지 아나? 내신이 다르고 특목고 대비가 된다.” 교사는 초등학교 4학년 학원생이 고등학교 수학 과정의 약수와 배수 문제를 술술 푼 시험지를 꺼내 보였다. “KMO(한국수학올림피아드) 대비 학생이다. 엄마들은 신기해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학원발이 무서운 거다.”

대치동의 C수학학원은 학부모 사이에서 초등 선행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곳이다. 입학시험이 까다롭기로 유명하고, 한 반에 10명이 정원인 이 학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학원’ ‘수학 영재들만 다니는 특별 학원’으로 손꼽힌다.

이 학원은 전국구다. 성북동, 중계동, 잠실동에서도 오고 심지어 지방에서 유학을 오는 경우도 있다. 대치동의 수학전문 D학원은 입학 절차가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무려 다섯 단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예약 접수 후 입학설명회에 참석하기까지 길게는 반 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입학설명회 참석 후 입학시험 등 네 단계가 더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간다.

2년 이상 선행학습을 시키는 학부모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정도 선행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한 아이들도 많다”라고 입을 모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학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꽤 있고, 수학학원만 여섯 군데 다니는 아이도 있다”는 말도 했다. 2년 이상 선행학습을 시키는 학부모 중 “우리 아이가 수학 선행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인정한 학부모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학부모들은 하나같이 수학 선행 전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어는 갔다. 수학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도 했다. 지금 학원가는 ‘누가 수학 진도를 더 앞서나’ ‘누가 더 어려운 심화문제를 풀어내나’ 경쟁이 치열하다. 교과부는 2012년 1월, “암기식 수학교육을 지양하고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재미있는 수학교육으로 개선하겠다”는 요지의 ‘수학교육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재미없고 어려워서 포기했던 수학의 흥미를 되찾게 해준다는 취지다.

취지는 좋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스토리텔링 수학에 사용되는 사고의 틀은 ‘교과통합형 사고’다. 정치와 수학을 연계, 투표와 선거구를 방정식과 함수의 그래프를 활용해서 풀거나 미술과 수학을 연계, 김홍도의 그림 속에 숨어있는 수학을 찾아내는 식이다. 교육 소비자들은 융합적 사고를 요구하는 스토리텔링 수학를 ‘재미와 흥미’보다는 ‘어렵고 생소하고 복잡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창의력 수학’을 지향한 스토리텔링 수학은 사교육 시장에서 ‘심화 수학’으로 정착돼 갔고, 선행학습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수학 선행 전쟁의 또 하나의 이유는 특목고 입시다. 2년 이상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 대부분은 특목고를 목표로 한다. 특목고 지망생 학부모들은 “영어는 기본, 수학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과학고 지망생뿐 아니라 외고도 마찬가지다. 입학 전형상으로는 영어만 잘해도 외고 입학이 가능하지만 영어 잘하는 학생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영어만 잘해서는 차별화되기 힘들다는 얘기다.

과학고의 경우는 더하다. 공식적인 자격요건은 아니지만 “과학고를 가려면 KMO 입상 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학부모 사이에서 공공연하다. KMO 문제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 전체에서 출제되기 때문에 KMO를 응시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끝내야 한다.

경기도 K과학고 김모 교사는 주간조선에 “과학고 입학생은 고등학교 수학 과정을 마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국제중 희망자의 93.7%, 특목고 희망자의 91.9%가 수학 선행학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학 콘서트 플러스’ ‘수학 비타민 플러스’ 저자로 수학 대중화에 앞장서 온 박경미 교수(홍익대 수학교육과)는 수학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요인 중 하나로 ‘수학의 위계성’을 지적했다. 박 교수는 주간조선과의 전화 통화에서 “수학은 기본적으로 돌고 도는 과목이다. 같은 내용을 고학년으로 갈수록 심화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심화형과 속진형(일명 선행) 구분이 애매하다. 초등학교 때 산술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를 방정식을 알면 쉽게 풀리는 것이다. 선행학습을 한 아이는 남보다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수학은 ‘속도 검사’라는 점에서 선행학습의 장점은 분명히 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선행학습의 달콤한 이점은 인정했지만 ‘수학 선행학습은 독’이라고 여긴다. 그는 “올림피아드에 출전하는 아이들에게는 선행학습이 필요하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선행학습은 해롭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교과서는 인지발달 단계에 맞게 짜여진 것이다. 선행학습을 통해 문제 풀이 방법을 배우면 비슷하게 따라할 수는 있지만 수학적 사고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무 일찍 난해한 수학 개념을 접하면 선행 시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워서 시큰둥하고 정작 배울 시기에는 아는 것 같아서 흥미를 잃는다. 결국 수학 혐오자를 낳는다.”

수학 선행학습의 효과가 있을까. 한국교육개발원의 ‘선행학습 효과에 대한 연구’를 보면 선행학습과 성적 상승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2 학생들의 과거 5년간 사교육 경험 여부와 성적 추이 관계를 분석한 결과, 선행학습 유무에 따른 두 집단 간 성적의 격차는 고학년이 될수록 점점 줄거나 오히려 역전됐다.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발적·자기주도적 학습을 해 나간 집단이 장기적으로 오히려 더 긍정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선행학습 집단은 선행을 믿고 노력하지 않거나 의존적 태도가 몸에 배어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윤지희 공동대표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학원에 계시는 분들조차 선행학습 효과는 중학교 때까지가 끝이라고 말한다”면서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와 통합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단계에 오면 선행학습 없이 혼자서 차근차근 해결해온 아이들이 치고 올라온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특목고 지망생들은 중학교 때까지 성적으로 판가름난다는 점이다. 손양의 어머니는 “특목고 입시에 필요한 내신과 경시대회 스펙을 쌓기 위해 수학 선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행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하는 아이라도 100점을 맞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교육부에서는 선행학습 금지 조치와 관련, 시·도 교육청 차원에서 교과 진도표와 내신평가 문제를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선행 문제를 출제하면 징계 조치까지 내리는 학교도 있다. 박경미 교수는 “의식 있는 교사는 산술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를 선행을 통해 방정식으로 풀면 오답처리 한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이에 대해 코웃음을 쳤다. 한 학부모는 “학원에서 그걸 모르겠나. 선행한 티가 안 나는 답안 작성 요령까지 가르쳐준다. 학원이 예술이다”라며 “학교와 정부 대책이 학원 수준을 도저히 못 따라간다. 그러니 선행을 시키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폭주 기관차처럼 가속화되는 수학 선행학습. 이를 저지할 방안은 무엇일까. 대한수학교육학회 강문봉 회장(경인교대 수학교육과)은 주간조선과의 전화 통화에서 “평가 방법을 내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줄을 세우는 ‘지필 평가’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학습 태도와 능력, 특장점을 기술하는 ‘서술형 평가’로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하는 것은 공교육 수업 질의 강화다. “스타 교사는 없다.

스타 강사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교사가 있으면 사교육계에서 잽싸게 달려들어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해 가는 관행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사교육 성행지역의 한 교사는 “교사들을 위한 유인책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는 한 교사가 우월하게 잘 가르쳐도 경제적 보상이나 승진 시스템이 없다. 잘 가르치는 교사와 시간만 때우고 가는 교사 간 대우 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굳이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강문봉 교수는 ‘부모들의 불안감’을 학생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직접적인 이유로 본다. 강 교수는 “수학교육과 교수인 나 역시 내 아이들을 수학학원에 보냈다. 집사람이 하도 불안해 해서다. 지금은 아이들이 대학생인데 결과적으로 수학학원의 효과가 없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수학 선행은 악순환을 초래한다. 수학 선행은 수학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선행을 하는 아이가 많아지다 보니 변별력을 갖기 위해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점점 어렵게 내고, 수학 시험이 어려워지다 보니 수학 선행을 안 하던 아이도 학원으로 달려가는 거다. 부모들의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는 방안이 우선시돼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점점 가속도가 붙는 수학 선행을 멈출 수 없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수학 선행 학부모들의 의견도 같았다. ‘불안감’이 수학 선행의 공통 원인이었다. “(선행을 시키면서도)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갈피를 못 잡겠다” “안 시키는 것보다는 덜 불안해서 시킨다”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고질병이다. 선행학습을 시키는 학부모들도, 안 시키는 학부모들도 모두 불안해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한순간 다 같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학부모가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수학 때문에 다른 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서 안타깝다. 나도 이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안다. 책도 많이 읽고 언어와 사회 공부도 해야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수학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 이런 아이들이 특목고에 가고 사회에 진출해 지도층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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