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8 10:07:41
이한동(李漢東) 전 국무총리는 몇해 전 ‘어문(語文)정책 정상화 추진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 오고 있다. 이 추진회는 작년 7월 결성됐다. 참여 인사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출신의 김문희(金汶熙)·황도연(黃道淵) 변호사와 조부영(趙富英) 전 국회부의장, 최근덕(崔根德) 전 성균관 관장, 심재기(沈在箕)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김경수(金慶洙)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등이다. 이 전 총리의 말이다.한자로 공부할 때 뇌가 활성화돼
세계적인 뇌(腦)과학자로 알려진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조장희(趙長熙) 소장은 “40년 넘게 해외에 있다가 들어왔더니 사람들이 한자를 안 써 한국인이 문맹(文盲)이 되어 있더라”는 말부터 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양전자 단층촬영기(PET)를 개발, 한국인 가운데 노벨상 수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학자로 거론되고 있다.
“서로 얘기들은 하지만 뜻을 전혀 몰라요. 뜻을 모르니 응용을 못해요. 왜 한자를 안 쓸까요. 아마 일본 식민지였다는 콤플렉스가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한자는 라틴어처럼 중국의 글자가 아니라 동양의 글자입니다. 과학기술 서적은 한문을 안 쓰면 이해를 못해요.”
조 소장은 한자교육과 뇌의 활성화에 대한 연구를 수년간 진행하고 있다. 그가 말한 바로는, 평균 나이 27세인 남녀 대학생 12명을 대상으로 2음절짜리 한자 단어와 한글 단어를 소리 내지 않고 읽도록 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뇌 영상으로 찍어 보니, 한글로 읽을 때보다 한자로 읽을 때가 뇌의 많은 부분에서 활성화가 이뤄졌다. 조 소장의 말이다.
“한자를 읽을 때는 방추상회(紡錘狀回·fusiform gyrus) 부분과 중심전회(中心前回·precentral gyrus) 부분, 그리고 양측 두정엽(頭頂葉·parietal cortex)과 브로카 영역(broca’s area)에서 더 증가한 활성화를 관찰할 수 있었어요. 이런 차이는 한자의 형태적 특성과 철자의 특성이 한글과 다르기 때문(방추상회 부분과 중심전회 부분)이며, 의미의 인출 및 사용 빈도와도 관련(브로카 영역과 두정엽)이 있을 것으로 여겨져요.
또 한자문자와 한글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뇌의 부위가 상대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결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이러한 결과는 한자교육에 대한 뇌과학적 연구의 초석이 될 것으로 사료돼요.”
조 소장은 이 실험 외에도 한자로 쓴 단어와 한글로 쓴 단어 중 어느 쪽을 더 많이 기억하는지를 실험했다고 한다.
“뇌 영상으로 보니, 단어를 한문으로 기억했을 때는 뇌의 여러 군데에서 활성화가 이뤄졌지만, 한글로만 기억할 때는 뇌의 한군데만 활성화되었어요.”
뇌의 활성화란 말을 풀어서 설명해 주세요.
“커피를 떠올려 보세요. 커피 하면, 그 맛과 향기, 거무칙칙한 원두, 커피잔 등 오만가지가 다 떠오르는데, 이처럼 떠오르는 것이 많을수록 기억이 잘됩니다. 한문을 읽은 사람은 뇌의 여러 군데가 활성화돼요. 그러니 한문으로 공부하고 익히는 것이 기억과 이해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자를 쓰는 중국인들은 머리가 좋겠네요. 게다가 중국어에는 고저장단(高低長短)도 있잖아요.
“훨씬 좋죠. 이해도, 기억도 잘합니다. 사성(四聲)은 뇌 자극을 더 잘 받겠죠. 그렇게 되면 중국과의 국제경쟁에서 우리가 지는 겁니다. 그러니 한자를 배우는 것이 국가 존폐와도 관련이 있어요. 비록 뇌과학자이지만 일부 쇄국적(鎖國的)인 언어학자들이 한글전용을 만든 것 같아요.”
북한과 일본의 경우
중앙대 국문학과 김경수(金慶洙) 명예교수는 북한과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김 교수는 “2차대전 이후 패전국 일본도 우리처럼 문자정책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는데, 한자혼용을 하자는 주장과 일본의 고유어(假名·가나)로만 표기하자는 주장이 팽팽했다”며 “패전을 의식한 많은 지식인이 고유문자인 가나만 쓰자는 주장이 많았다”고 했다.
당시 도쿄대 교수인 구라이시 다케시로(倉石武四郞)는 “중국도 문자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터에 우리가 한자를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장차 한자는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런 분위기에 맞서 이시이 이사오(石井勳)라는 교육학자가 가나문자만으로는 일본문화 발전을 가져올 수 없으니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맞섰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그럼에도 한자폐지 주장은 집요했어요. 애국을 앞세운 일본 고유어 가나 쓰기 운동은 식을 줄을 몰랐어요. 이런 와중에 일본 언론들이 이 논란을 주시했고 그 중심에 일본 공영방송인 NHK와 아사히(朝日)신문과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있었습니다. 이들 언론사의 편집자들은 이시이의 한자정책을 택했어요. 결국 일본의 문자정책 수립에 언론의 힘이 컸던 셈입니다.”
그는 “현재 일본은 유치원, 초등, 중등학교에서 1945자의 한자를 필수적으로 배우고 지금은 다시 2136자로 상용한자를 늘렸다”고 했다.
“일본은 유치원생에게도 600자의 한자를 가르치고 있으니 일본 문자정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고유어인 가나문자와 한자를 혼용해 2세 교육을 하는 셈이지요.”
북한의 어문정책은 어떨까. 김 교수는 “북한의 어문정책은 한국보다 훨씬 일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1949년부터 지금까지 교과서는 물론 신문, 잡지까지 한글전용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64년과 1966년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연두 교시(敎示)를 통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더니 1970년에 2000자(초·중·고)와 1000자(대학)를 지정해 누구나 한자를 학습하도록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김일성의 교시에는 ‘통일에 대비해 남조선이 쓰는 문자를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김경수 교수의 말이다.
“현재 북한은 인민학교(우리나라 초등1~4학년)에서는 한문을 가르치지 않지만 고등중학(우리나라 초등5~고등1)에서는 한자 1500자를 가르치고 있어요. 기술학교용 500자는 별도이므로 사실상 2000자를 중등과정에서 가르칩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1000자를 더 가르쳐 모두 3000자를 배우고 있어요. 북한이 우리보다 먼저 《리조실록》을 완역 출간해 우리나라에 역(逆)수출한 것도 이와 같은 한문교육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漢字가 아니라 韓字다!
1970년 이후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교육의 부활을 주장하는 수없이 많은 주장과 청원이 있었다. 김문희 변호사는 “1970년부터 작년까지 학술단체와 개인 등이 정부 등 관계기관에 제출한 청원·건의·성명서가 무려 119건에 이르고, 지난 2008년 9월에는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 등 생존 중인 역대 국무총리 20인이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촉진하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한 일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2009년 교과부는 개정 교육과정을 발표하며 ‘초등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중점’ 사항으로 ‘학교장 재량으로 한자교육을 관련 교과(군)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학교마다 천차만별이어서 ‘국민교육’으로 전혀 기능을 못하고 있다.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한자(漢字)를 ‘한자(韓字)’라고 이름을 붙인다. “20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쓰는 한자(漢字)는 한국의 사상·정서를 고스란히 담아 한자화(韓字化) 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자(韓字)는 중국의 한자(漢字)와는 그 의미, 그리고 독음(讀音)에서, 또 소리에서 전혀 다른 한국식 한자입니다. 사실, 한자(韓字)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2000년이 넘게 이 땅에서 만들어져 학술어·추상어·고급개념어가 역사·전통·정신 속에 융해돼 있어요. 이제 우리의 뜻과 정신이 깃든 우리의 국자를 한자(漢字)에서 독립시켜 한자(韓字)로 지칭하고, 구분하여 표기해야 합니다. 한자의 범위는 우리의 국어사전에 수록된 어휘를 기준으로 모두 한자(韓字)로 규정해야 합니다.” 그는 “한국식 한자 역시 우리글인 만큼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자로 된 한국학 연구, 해독하기 어려워 외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