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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정해둔 키워드는 부녀를 만난 지 5분 만에 박살났다. 부녀에게 ‘독서교육’을 키워드로 풀어가고 싶다고 하자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음, (제 자녀교육 철학을) 그렇게 소개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박웅현)
“‘아빠의 독서교육 덕분에 내가 이런 사람이 됐다’는 아니에요. 책의 길은 꽤 일찌감치 아빠와 갈렸어요.”(박연)
“그것 말고요, 아빠의 친구 같은 면? 그건 말이 돼요.”(박연)
“그래 그래, 그거 좋다. 그건 동의가 돼요.”(박웅현)
부녀는 속사포 같은 속도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결국 자녀교육 키워드를 ‘친구 같은 아빠’로 정했다. 연이씨의 말이다. “아빠와 나는 선후배 사이 같아요. 외국 친구들에게 아빠를 ‘내 첫 번째 멘토’라고 소개해요.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멘토는 혼내주지 않아요. 함께 걱정해주지. 저는 제 최고의 멘토인 아빠가 해주는 가이드라인을 믿고 따라요. 결국 결정은 제 스스로 하지만.” 그리고 아빠를 보더니 “그리고 아빠가 잘 살았잖아, 그치?”라며 활짝 웃었다.
둘 사이에는 권력 관계가 없다. 아버지 박씨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부모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도 없다. 딸의 기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공감해준다. 그래서 딸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개최한 생일 파티 때 엄마 대신 아빠가 와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친구 같은 아빠와 나누는 대화에는 벽이 없다. 소소한 일상부터 학교 숙제, 남자 친구 이야기까지 톡 까놓고 허물 없는 대화를 한다. 연이씨는 “보수적인 아빠였다면 아빠와 거리가 멀어졌을 거다. 자신의 문화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아빠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딸은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자녀와 친구 같은 사이가 되기 위한 비결은 뭘까. 박웅현은 광고 카피 같은 한 문장을 내놓았다. “아이를 덜 사랑하세요.” 아이를 덜 사랑하라니. 이 무슨 무책임한 말일까. 그가 ‘아이를 덜 사랑하라’는 말은 이런 차원이다. “아이는 독립적인 유기체다. 나와 다른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보도록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내 딸이지만 만나는 사람이 다르고 살고 있는 시대정신이 다른데 어떻게 내 주관을 집어넣을 수 있겠나. 우리나라 부모는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게 문제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다, 너를 위한 희생이다’라는 발상은 위험하다. 아이의 인생에 족쇄를 채우는 거다.”
그는 “자식을 내 인생 최고의 작품으로 보거나 내 인생의 종합성적표로 보는 시각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한 외고생이 자살하면서 부모에게 남긴 편지를 언급했다. “엄마한테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사랑한다’가 아니라 ‘행복하다’는 말이었어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 부모 스스로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딸에게 무관심하거나 딸을 향한 사랑의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쓰고 싶은 대상이 바로 딸”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사랑하지만, 부모의 욕심이 투영된 사랑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단적인 에피소드 하나. 이번 연이씨의 귀국은 1년 만이다. 외동딸을 유학 보낸 부모는 오매불망 딸의 귀국일만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1년에 두 번 방학마다 귀국했던 연이씨는 지난 겨울방학 때 한국에 오지 않고 친구들과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부모의 반응은 엇갈렸다. 엄마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아빠는 쿨하게 승낙했다. 아빠와 딸의 심정은 이렇다.
“비행기 티켓값만 왕복 200만원이 넘는데, 그 돈으로 한국에 가는 대신 여행을 다니면 더 좋지 않을까? 세계 여러 나라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 얼마나 좋아?”(박연)
“내심 서운했던 것 사실이다. 딸이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다. 딸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을 해봤다. ‘내가 그 나이라면?’ 당연히 여행을 하고 싶고, 크리스마스를 친구들과 보내고 싶을 거다. 쿨하게 승낙했다. 여행은 길에서 읽는 책이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박웅현)
딸은 런던, 파리, 오슬로 등 곳곳을 신나게 여행했고, 난생처음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박웅현은 “우리도 너 없이 나름 좋았어. 얼마나 로맨틱했다고. 거실에서 춤고 추고”라고 웃었다.
박연은 자신의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소개한다. ‘콩가루 집안’은 아빠의 친구 같은 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박연식 콩가루 집안은 ‘망해가는 타락한 집안이 아니라 온 가족 모두가 친구처럼 지내는 집안’이다. 박웅현 가족은 부부와 딸, 달랑 세 식구다. 셋은 동등하다. 아니, 동등하다 못해 일반적인 가족의 권력구조를 뒤집어버린다. 가족 내에서 엄마는 절대권력, 아빠는 최하층민으로 불린다. 이 표현에 가족 구성원 모두 동의한다. 연이씨는 “밖에서는 아빠가 멋지고 카리스마 넘친다고 하는데, 엄마랑 나는 믿을 수 없다. 집에서 아빠는 제3계급이다”라며 “큭큭” 웃었다.
콩가루 집안 세 식구의 일상은 포복절도할 에피소드 투성이다. 주말마다 영화 나들이를 한 후 미성년자 딸을 각종 선술집으로 데리고 다니고, 집에서는 ‘베드 와인’을 즐긴다. 말 그대로 안방 침대에 세 가족이 모두 모여 와인을 마시며 수다 떨며 노는 것이다. 연이씨의 목덜미에 있는 꽃 문양 문신은 온 가족이 심혈을 기울인 합작품이다. 무늬를 다 함께 고안했고, 디자인은 아빠 친구가 해 주었으며, 홍대 앞 문신 스튜디오 역시 아빠 지인이 소개해주었다. 셋이 다 함께 문신 스튜디오를 찾아갔고, 딸의 문신이 끝날 때까지 부모는 저녁을 먹으며 기다렸다.
박연이 자신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를 엮어 낸 책 ‘인문학으로 콩 갈다’는 1만부 넘게 팔렸다. 아빠가 낸 세 권의 책(‘인문학으로 광고하다’ 10만 부, ‘책은 도끼다’ 16만부, ‘여덟 단어’ 출간 한 달 만에 2만부)에 비하면 흥행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엄연히 꾸준한 독자를 거느린 작가다. 이 책은 원래 ‘아빠의 육아일기’ 콘셉트로 기획됐다. 박웅현씨가 딸과 큭큭대며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본 회사 후배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딸과 재미있게 소통할 수 있느냐? 육아일기 한번 써 보라”고 권유했고, 아빠는 딸에게 바통을 넘겨 “네가 직접 네 인생 19년의 육아일기를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인문학으로 콩 갈다’ 출간 이후 박웅현은 ‘자녀교육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생겼다. 학교나 학부모 모임에서 강연도 종종 한다.
딸 연이씨에게 꿈을 물었다. 연이씨는 “꿈이 없다”고 당연한 듯 말하더니 “아빠는 그게 좋은 거라고 한다”고 했다. 아빠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대충대충 살고 하루하루는 충실하게 살라는 말을 좋아한다. 요즘 강의에서 젊은이들에게 꿈을 좀 꾸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판사, 외교관, 이런 거창한 꿈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작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살아 보니 인생이란 좋은 점들을 취하면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더라.”
연이씨는 아빠의 말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삶은 순간의 합이다.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