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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를 만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신영희 명창

2013/03/26 16:41:30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소리 천재'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에요. (문화재 지정은) 묵묵히 순리대로 살아온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스승 만정 김소희(1917~1995년) 선생님의 좋은 소리를 더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해야지요."

신 명창은 1942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판소리 명인 신치선 씨의 딸로 태어났다. 2남 2녀 중 셋째였던 그는 어릴 때부터 판소리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에겐 특히나 어렵고 고달픈 길"이라며 말렸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귀동냥으로 판소리를 익혔다.

"열한 살 때였어요. 하루는 아버지와 나이 많은 제자 분이 소리 연습하는 걸 듣다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을 박차고 들어갔어요. '흥부가' 중 흥부가 매품을 팔러 갔다가 소득 없이 돌아서는 대목을 불렀지요. '나는 가네, 나는 가네' 하고요. 제자 분은 놀라워하며 칭찬해주셨고,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셨어요. 결국 어머니의 설득까지 더해져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웠지요."

이듬해 그의 가족은 진도를 떠나 소문난 소리꾼들이 모인다는 목포로 이사했다. 처음에 반대했던 아버지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딸을 애지중지했다.

그는 탁 트인 소리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목과 배에 심한 통증이 찾아와 1년간 식초와 섞은 계란 흰자를 먹으며 버티기도 했다. '유달산 다람쥐'란 별명도 얻었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유달산에 올라 노래 연습을 해서다. 당대의 예인 장월중선 선생에게 춤과 연기도 익혔다.

하지만 그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시련이 닥쳤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마저 병으로 몸져누워 그는 어린 나이에 판소리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방송국 일을 도맡아 했고, 시골 잔치를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러주고 품삯을 받았다.

◇"무대에서 소리 하다 죽고 싶다오"

1963년부터 전국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74년, 공연을 위해 목포를 방문한 김소희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김 선생의 권유로 그는 서울행을 결심한다. 이후 1977년 남원춘향제 명창부 대상을 받는 등 명인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말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KBS TV '쇼 비디오자키'의 '쓰리랑 부부'에 출연, 대중적 인기도 얻었다.

그는 "판소리는 한편의 모노 드라마이자 종합예술"이라고 강조했다. "혼자서 여러 등장인물을 묘사하며 극을 끌고나가는 게 쉽진 않지만, 그만큼 다양한 소리와 몸짓을 선보일 수 있어 매력적이에요. 또 삶의 희로애락과 서민의 애환이 닮긴 우리네 토속 장르이지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신 명창이 가장 으뜸으로 꼽는 건 '춘향가'다. 사랑, 신분제도, 빈부격차 등 다양한 주제를 두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절절한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극적인 장면도 많아 흥미진진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선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까. "우선 생김새가 호감형이어야 합니다. 무대에 서야 하니까요(웃음). 정확한 발음은 물론, 상황에 맞는 발림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채를 쫙 펼쳐 바람이 부는 모양새를 흉내 낸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마지막으로 소리의 강약을 조절해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야들야들한 소리를 내다가도 필요에 따라 폭포수가 몰아치듯 우렁찬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하지요."

올해로 '환갑'을 맞은 그의 판소리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다. "판소리는 제 삶이자 생명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판소리를 할 거예요. 남은 꿈이 있다면, 버스 한 대를 빌려 제자들과 시골 마을을 다니면서 '판소리 나눔'을 하는 겁니다. 농사일도 거들면서요. 좀 더 큰 소망은 무대에서 소리 하다 죽는 것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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