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01 16:53:48
공화정이란 투표로 선출된 대표자나 대표 기관이 나라의 일을 결정하는 정치 형태를 말해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제의 반대 개념이기도 하죠. 초기 로마의 공화정은 적은 숫자의 귀족으로만 이루어졌지요. 하지만 평민들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면서 자신들에게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귀족과 평민이 함께 법을 만들고 관리를 뽑게 되었어요. 귀족과 평민 사이의 모든 차별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로마의 귀족과 평민들은 힘을 합쳐 이탈리아 지역을 통일한 뒤 지중해 주변 지역까지 정복했어요. 하지만 오랜 전쟁의 결과 귀족들은 더 부유해지고 평민들은 더 가난해졌어요. 귀족들은 전쟁에서 이긴 후 얻은 땅과 노예로 큰 농장을 가꾸었지만 평민은 전쟁이 나면 군인이 되어 싸우느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귀족이든 평민이든 사람은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해."
귀족 집안 출신의 정치가였던 그라쿠스 형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땅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주장했어요. 이것이 바로 '농지법'이에요. 하지만 땅을 빼앗기기 싫었던 귀족들은 그 주장에 반대했어요. 그래서 원로원은 농지법이 실현되지 못하게 방해했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답니다. 이후 로마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어요. 이 시기에는 노예들도 세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어요. 모두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갖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지요.
◇세 명의 힘을 모아 로마를 다스리다
로마의 종교법을 관리하는 '최고 제사장'이 된 카이사르는 평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했어요. 그래서 평민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 매번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어요. 그래서 카이사르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 부자였던 크라수스와 손을 잡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기로 했어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도 귀족들의 막강한 권력에 불만이 많았거든요. 이렇게 로마에서 세 명의 힘 있는 사람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를 '삼두 정치'라고 해요.
얼마 후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자리인 집정관에 올랐어요. 그는 평민들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어요. 그동안 숨겨왔던 원로원 회의 내용도 벽에 붙여 시민 모두가 알게 했어요. 또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고, 그라쿠스 형제가 실패했던 '농지법'도 통과시켰지요. 그러다 보니 원로원의 귀족에게는 카이사르가 눈엣가시였어요.
◇카이사르, 공화정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다
어느 날 크라수스는 오늘날 이란 지역에 있었던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다 목숨을 잃었어요. 그러면서 삼두 정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지요.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손을 잡고 집정관이 되어 카이사르를 몰아내고 혼자서 권력을 잡으려 했어요. 그러자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고 폼페이우스를 물리쳤어요. 이후 카이사르는 혼자서 로마를 다스리며 평민을 위한 정책을 세워나갔어요. 마침내 로마는 평화를 이룬 것 같았지요.
하지만 몇 년 후 카이사르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고 한다면서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그를 죽이고 말았어요. 하지만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도 공화정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강력한 권력을 잡고 귀족들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지요. 역사가들은 그를 로마 최초의 황제라고 부른답니다. 이렇게 귀족과 평민의 협력으로 유지되던 공화정 시대가 끝나고 오랜 세월 동안 번영을 누리게 될 로마 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어요.
ㅣ세계사 통합교과ㅣ사회 로마와 오늘날의 대표를 뽑는 방법을 비교해요
로마에서는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았어요. 집정관이 최고의 관직인 만큼 혼자서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게 두 명을 뽑아 서로를 견제하도록 했던 것이지요. 카이사르는 집정관 후보로 출마한 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투표를 통해 비불루스라는 사람과 함께 집정관이 될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