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8 17:20:51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 건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갈래로 노력한 결과야.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3·1 만세 운동을 펼치고, 대한민국임시 정부를세우며 해외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같은 의사들의 의로운 행동도 있었고 홍범도와 김좌진 같은 독립군의 활약도 있었어.
일제의 우리말 사용금지에 맞서 끝까지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던 학자 등 문화, 예술,체육 방면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우리 민족의 혼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지.
그러나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김구의 표정은 밝지 못했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의 시안과 푸양 훈련소에서 군인들을 훈련시키며 만반의 준비를 해 왔는데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 소식으로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기에 그의 아쉬움은 더욱 컸단다. 김구는 ‘우리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이룬 독립’이라며 걱정스러워 했지.
광복에 대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38도선을 경계로 북한엔 소련군이 남한엔 미군이 들어와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과 미국이 일정기간 동안 우리 민족을 다스리기로 결정했다는 거야. 김구가 걱정한 그대로였지.
◇이념으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지금의 러시아) 등 세나라는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에 합의했어. 신탁통치란 ‘최대 5년간 우리나라를 다스린 후 독립을 시켜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
신탁통치의 내용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크게 혼란스러워했어. 일본을 대신해서 또 다른 나라들이 우릴 다스리겠다고 하니, 독립된 정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며 신탁통치에 반대했단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이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우리 민족은 찬성쪽과 반대쪽으로 나뉘게 되었어. 특히 모스크바 3상 회담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일부 신문이 잘못된 보도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더욱 갈라놓았지. 소련은 북한을 완전히 점령할 목적으로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보도된 거야.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고,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탁통치 찬성=소련편=좌익=매국노, 신탁통치 반대=미국편=우익=애국자’의 공식이 만들어졌어.
일제에 맞서서 힘을 모으던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처럼 왼쪽과 오른쪽으로 편이 나누어져 날카롭게 대립했지. 더욱 기가 막힌 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친일파들이 교묘하게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쪽으로 숨어들어 애국자가 된 거야.
그런데 정작 모스크바 3상 회담의 중요한 내용은 우리 민족이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어.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좌익 편에 섰던 사람들은 신탁통치를 찬성한 게 아니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지지했던 거였지. 그러나 이미 찬반으로 생각이 나뉜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며 끝내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하고 말았단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로 나뉘었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제 나라의 편을 늘리려던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대립을 ‘냉전’이라고 해. 결국 우리 민족은 그 피해자가되었지. 처음엔 38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남북한 사람들은 소련의 사회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를 따르는 생각의 차이로 점점 멀어지게 되었어. 이로 인해 남북한이 하나의 통일된 정부를 세우는 길은 더욱 멀어 보였지. 김구는 1948년 38도 선을 넘으며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두 개의 정부는 안 된다”며 통일 정부 수립을 강하게 주장했어. 한편 이승만은 더 늦기전에 남한만이라도 단독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맞섰단다.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