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08 15:52:44
◇양반에게 세금 매기고 부정부패 감시
세도정치 체제에서 백성을 가장 힘들게 만든 건 어지러운 세금 제도였어.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세금을 내야 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사람들도 세금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하지만 당시 세금은 오로지 백성들만 내야 했단다. 왜냐고?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여서 가장 높은 계층인 양반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권리를 가졌거든. 가장 낮은 계층인 노비 역시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해 세금을 내지 않았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도 가문에게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관리가 된 후 본전 생각에 백성들에게서 억지 세금을 함부로 거둬들였어. 이래저래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난리(亂)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지.
대원군은 이 같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제도 개혁에도 팔을 걷어붙였어. 세금을 내지 않던 양반에게도 세금을 거둬들이는가 하면, 곡식을 빌려 먹은 후 갚지 않는 데서 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을마다 믿음직한 사람을 둬 그 일을 맡김으로써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았지. 양반과 관리들은 이런 결정을 일제히 반대했지만 대원군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어. 그러자, 양반들은 점점 대원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기 시작했지.
◇경복궁 공사 관련 정책은 ‘옥의 티’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하나둘 고치며 왕권을 강화해가던 대원군은 “이번 기회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불탄 경복궁을 다시 짓는 일이었어.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이 버려진 채로 있다는 건 ‘보잘것없는 왕의 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면 엄청난 돈과 일손이 필요했어. 그 때문에 이전 왕들도 경복궁을 다시 지으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지. 더군다나 세도정치 아래에선 경복궁 공사를 반대하는 신하들에 밀려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어.
대원군의 지시로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자, 수많은 백성이 불려 나와 일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작업 도중 발생한 화재로 공사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백성들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져 갔단다. 농사 지을 시간도 없이 경복궁 공사에 동원됐으니 그럴 만도 했지. 실제로 당시엔 공사에 끌려간 백성들의 고달픈 마음이 담긴 노래(‘경복궁 타령²’)까지 등장했다고 해.
한편, 대원군은 경복궁을 다시 짓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當百錢)³’이란 화폐를 발행했어. 당백전은 이름 그대로 돈의 값어치를 100배로 올려놓은 돈이란다. 당백전을 찍어내자,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계속해서 올라갔어. 당연히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대원군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는 높아갔지. 결국 대원군은 백성들을 배려한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도 경복궁 공사와 관련된 정책에서만큼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고 말았어.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세도정치로 부정부패가 심했던 당시 조선 사회를 차츰 바꿔갔단 점에선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단다.
+곁들여 읽기
1. 사진은 경북 영주에 위치한 소수서원(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이곳의 원래 이름은 백운동서원인데요. 조선 제11대 왕 중종(1488~1544년) 때이던 1542년 당시 풍기군(오늘날 영주시 풍기읍) 군수 주세붕(1495~1554년)이 세운 게 시초입니다.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뀐 건 명종(제13대 왕·1534~1567년) 때이던 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1501~1570년)에 의해서예요. 대원군의 대대적 서원 정리에도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죠. 지난 1963년 1월 사적 제5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