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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출발했다… 기술에선 내가 최고다

2011/08/18 03:42:03

경북 구미가 고향인 이 반장은 1970년대 중반 취업이 잘되기로 소문난 구미전자공고에 들어가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고교 졸업 후 1985년 코오롱인더스트리에 입사해서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배워나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일을 익혀 나갔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공장 기계에 이상이 생겨 협력업체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거리가 없어진 이들은 "(공장에)나가서 청소라도 하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공장 기계 때문에 직원들이 크게 다칠 뻔한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때 이 반장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정말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야근이 없는 날과 휴일엔 도서관에 갔다. 어린 딸이 "아빠는 매일 도서관에 가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1~2년에 한 개씩 지금까지 10개의 자격증을 땄다. 나이 사십이 넘은 2002년에는 새로운 기술에 목말라 한국폴리텍대학에 들어가 후배들과 함께 공부했다.

이 반장은 "1980년대만 해도 우수한 학생들이 상고·공고에 갔고 공무원·은행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며 "요즘 기능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안 좋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 반장과 함께 19일 금오공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김하수(54) 삼성전자 상무이사는 전남 신안의 안좌도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중3 때 경북 구미에 금오공고가 생겨 전국에서 첫 입학생 360명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비, 기숙사비, 생필품까지 무료였다. 중학교에서 1~2등을 다퉜던 김 이사는 교장 추천으로 금오공고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독일에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마이스터'(장인)를 꿈꾸며 창원기능대학을 다녔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생산기술연구소에 입사해서는 당시 초기 도입 단계였던 '공장 자동화 시스템'을 담당했다. 김 이사는 "TV, VCR 등 전자제품이 내가 개발한 자동화 장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능인이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밤샘도 마다 않고 땀을 흘린 끝에 1985년엔 정부로부터 기계가공 기능장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1998년엔 16년간 일해온 연구소를 떠나 구미의 금형 공장 책임자로 발령이 났다.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등을 찍어내는 '틀'을 담당하는 금형은 중요하지만 힘들다고 소문난 분야였다. 하지만 김 이사는 '내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주변에서 대우도 받는다'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일했다.

김 이사는 금형 기술에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결과 27일 걸렸던 금형 제작 납기일이 5일로 줄어들었다. 전체 생산성도 덩달아 5배 높아졌다. 동료들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일을 추진력 있게 밀어붙이는 김 이사를 '불도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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