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 여기는 어린이가 많습니다. 광복절은 어떤 날인가요?
“광복절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가 다시 나라를 되찾은 소중한 날입니다. 독립운동을 펼치며 나라를 되찾고자 노력한 수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결실을 맺은 날이기도 하죠. 광복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누굽니까?
“독립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면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지요. 독립의 의지를 가진 모두가 독립운동가이자, 중요한 인물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여러 방면에서 독립에 힘썼답니다. 우리나라 상황을 다른 나라에 알린 사람, 일본에 대항해 무장(武裝·전투 장비를 갖춤)투쟁을 벌인 사람도 있었죠. 직접적으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를 숨겨주거나 그들에게 돈을 보태주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어린이들에게 가장 소개해주고픈 독립운동가를 꼽는다면요.
“단연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년)입니다. 그는 3·1운동 직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를 정착시킨 인물이에요. 상하이와 러시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한성(서울) 등으로 각각 떨어져 있던 임정을 통합해 힘을 집중시킨 주인공이기도 하죠. 임정은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데 외교적·군사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어요. 윤봉길(1908~1932년)이나 이봉창(1900~1932년) 등이 일본 왕이나 고위 관계자를 대상으로 펼친 각종 의거(義擧·정의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 등이 의로운 일을 꾀함) 활동도 임정 소속 ‘한인애국단’의 작품이지요.”
-미국이 우리나라의 독립에 힘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의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미국은 처음엔 우리나라 독립에 관심이 없었어요. 3·1운동 즈음 몇몇 독립운동가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일본의 내정(內政·국내 정치)문제’라며 거절했을 정도예요. 당시엔 ‘한국’이란 나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미국으로선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질까봐 신경이 쓰였겠지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일본에 뒤통수를 맞은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부랴부랴 한국의 독립을 위한 각종 정책을 만들었죠. 미국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결국 우리나라는 광복 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게 됐어요. 그리곤 안타깝게도 분단에 이르렀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발로 뛴 외국인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미국인 톰킨스 씨(Floyd W.Tomkins·1850~1932년)였어요. 여러분에겐 아마 조금 낯선 인물일 거예요.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였어요. 그는 1919년 4월 서재필(1864~1951년)과 함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전 세계에 한국 독립문제를 호소하고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을 알리기 위해 추진된 회의)’ 때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또 한국 문제를 돕기 위해 외국인 중심으로 구성된 대표적 친(親)한 단체 ‘한국친우회’(1919년 5월 결성)의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어요. 1920년 5월 23일자로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 삼은 후 한국의 정치·경제·교육 환경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철회(撤回·이미 한 주장을 거둬들임)돼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보내기도 했답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힘쓴 인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