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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위인전] 이해인 수녀

2011/07/12 16:34:52

◆독서와 상상이 취미였던 ‘꼬마 시인’
난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어요. 강원도 양구가 고향이지만 어린 시절은 아버지 직장이 있는 서울에서 보냈죠.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어요.
여섯 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터졌어요. 우리 가족은 둘로 나뉘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죠.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통에 북한에 끌려가시고 말았어요. 아버지와의 추억은 함께 꽃밭을 가꿨던 게 유일하네요.

난 조용하고 상상하길 좋아하는 새침데기 소녀였어요. 밖에서 뛰노는 것보다 책 읽고 상상하는 걸 좋아했죠. 집에선 언니 오빠가 항상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윤동주의 ‘서시’ 등을 외곤 했어요. 덕분에 나도 자연스레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죠. 난 왠지 소설보다 시에 더 끌렸어요. 시엔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상징적 언어로 압축해 담겨 있잖아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학교 가는 길’이란 제목의 시로 상을 받았어요. 어머니가 난로에 따뜻하게 덥혀준 운동화를 신고 차비를 아끼기 위해 걸으면서 눈 쌓인 겨울 나무와 얘기를 나누는 내용이었죠. 물론 시 속 주인공은 나였어요. 중학교 시절엔 내가 쓴 시가 교지에 실렸고, 고교생 땐 전국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거머쥐기도 했어요. 문학소녀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간 셈이죠.

공부는 꽤 잘했어요. 마음 맞는 친구와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공부하곤 했죠. 제일 잘하는 과목은 국어였지만 영어와 역사 과목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 땐 부모님을 졸라 영어학원에 다니기도 했어요. 앞으로 영어가 널리 쓰일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당시 같은 학원에 다니던 남학생들에게 연애편지도 몇 번 받았어요.(웃음)

◆시(詩)와 편지에 사랑과 기도 담아
수녀가 된 건 언니 덕분이었어요. 먼저 수녀가 된 언니가 수녀원 생활에 대해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이라며 편지를 보내오곤 했거든요.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당시 날 포함한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영국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년) 등 인류를 위해 몸바치는 영웅을 한두 번쯤 꿈꿨거든요. 물론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고요.

참, 이해인이란 이름은 수녀원에 들어온 후 만든 필명(筆名·글을 써서 발표할 때 사용하는, 본명이 아닌 이름)이랍니다. ‘바다 해(海)’ 자와 ‘어질 인(仁)’ 자로 이뤄져 있죠. ‘인’ 자는 오빠(이인구)와 언니(이인숙) 이름에서 따왔어요. 여기에 평소 바다를 좋아해 ‘해’자를 곁들였죠. 원래 이름은 이명숙이에요. 

수녀가 된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카톨릭 소년’이란 잡지에 내가 쓴 시 세 편이 추천을 받았어요. 1976년엔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나왔죠. 이후 꾸준히 시와 수필 등을 쓰고 있어요.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와 참고도서에 내 시가 실렸을 땐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난 언어가 ‘삶의 열매’라고 생각해요. 시에 아름다운 삶을 위한 사랑과 기도를 담는 게 내 목표죠.

수도자로서 난 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해왔어요. 내가 시인으로 유명해지자, 시골에 사는 소년·소녀부터 감옥에 있는 사람들까지 내게 엄청난 양의 편지를 보내왔어요.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편지들을 쌓아놓고 짤막하나마 진심을 담아 카드를 써 보내곤 했죠. 그 카드를 보고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는 이들이 참 많아요. 그들을 보면서 나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재밌는 얘기 하나 더 해줄까요? 1980년대엔 가출 청소년들이 수녀원으로 날 많이 찾아왔어요. 날 만나면 뭔가 해결될 것 같았나 봐요.(웃음) 난 그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잘 달랜 후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은 동료 수녀님에게 부탁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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