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을 떠났던 김군은 아버지 사업 실패로 중3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역 교육청 장학생으로 학비를 지원받아 청심고에 입학했지만, 고1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셔 김군은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전업 주부였던 어머니가 구청에서 시간제 근무로 버는 월 60여만원으로는 아파트 월세를 내기도 버거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3개월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도 많았고요. 다행히 친구 어머니의 소개로 심리 치료를 받고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도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 어머니를 돕는 것이다'라며 격려해줘 마음을 다잡았죠."
학교의 허락을 받아 주말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 어머니 생활비와 자신의 기숙사비를 마련하면서도 그는 3년 내내 반장과 임원을 도맡아 했다. 학원 대신 선생님과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가며 공부에 매달렸던 김군의 SAT(미국 대학 입학시험) 점수는 2400만점에 2360점. 대학 교양 과목 선행 수업인 AP(Advanced Placement) 8과목도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용산 주한미군부대 보이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해 이글 스카우트 메달도 받았다. 이 상은 미국 내에서도 2%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대입, 취직에서 가산점은 물론 군 지원시 한 계급을 올려줄 만큼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상이다. 시간을 쪼개가며 자신을 채찍질한 끝에 그는 올해 단 3명뿐인 다트머스대 한국인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