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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논술] 127시간

2011/03/09 15:59:18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애론은 마침 자신의 능력을 뽐낼 좋은 기회를 만난다. 협곡 사이를 걷다가 길 잃은 두 명의 여성 여행자를 만난 것. 그는 여자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17.2마일이나 떨어진 목적지까지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나선다. 말발 좋고 서글서글한 애론은 웬만한 가이드보다 훨씬 풍성한 해설도 곁들여준다. 사실 블루존이 옛날 서부극 배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명칭이라는 것, 이곳에서 서부극을 자주 촬영했던 이유는 배경도 잘 어울리지만 무엇보다 야생말이 많이 서식하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영화제작팀은 영화에 사용할 야생말을 생포하기 위해 곳곳에 함정을 파놓기도 했다는 흥미로운 사실까지…. 낯선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수그러지자 그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불안에 떠는 여자들을 유쾌하게 놀려댄다. 절벽 아래에는 블루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푸른 호수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자연은 엄마 품처럼 넉넉하게 세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아준다.

자연은 대체로 긍정의 이미지를 가진다. 의지하고 싶을 때 기대면 언제든 두 팔을 벌리고 나약한 인간을 힘껏 안아줄 것 같은 모성애 가득한 이미지다. 그런데 사실 자연의 포용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넉넉하지 않다. 인간의 오만이 지나치면, 자연은 재빨리 선한 얼굴을 거두고 무서운 대재앙의 폭격을 가한다. 블루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한 애론은 자연의 포용력을 과신했다가 큰코다치는 인물이다. 그는 자연 앞에서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다. 두 여자와 헤어지고 홀로 절벽 탐험을 즐기던 그는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절벽은 깊지 않고, 그의 몸을 결박한 돌덩어리 역시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애론의 몸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바위 사이에 손목이 조금 눌렸을 뿐인데, 암벽 사이로 빠져나갈 방법은 묘연하다.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은 약을 올리듯 남자의 생명을 째깍째깍 갉아먹는다. 그에게 남아 있는 장비는 낡은 로프와 랜턴, 500㎖의 물 한 통과 캠코더뿐. 블루존을 한손에 쥐고 흔드는 줄 알았던 애론은 이제 블루존의 손바닥 안에서 치열하게 생존을 다투는 비루한 존재로 변한다.

'127시간'은 암벽 사이에 고립된 애론의 127시간을 정직하게 따라간다. 날짜로 따지면 약 5일 여의 시간, 아이디어를 짜내고 생존의 의지를 발휘한다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 애론은 엔지니어답게 우선 몇 개 안 되는 장비들을 이용해 '이성적으로' 탈출 방법을 궁리한다. 로프를 던져 바위를 들어 올려 보고, 등산용 칼을 이용해 손목을 짓누르는 바위를 깎아낸다. 모든 게 여의치 않은 순간에도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구조대원을 향해 소리를 크게 지르고, 온기를 쬐기 위해 한 줌 햇빛 사이로 다리를 내민다.

'127시간'은 협곡 바깥으로 카메라를 거의 빼지 않고, 생존을 향해 다투는 한 남자의 모습을 오롯이 지켜본다. 광대한 자연 앞에서 먼지처럼 작고 미약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까. 처음엔 최대한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남자도 시간이 흐르자 점점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블루존 캐니언은 너무나도 평온하지만, 그 안에 고립된 애론은 애처롭다 못해 구질구질하다. 그는 오줌을 마시고, 급기야 자신의 손목을 등산용 칼로 힘겹게 잘라낸다. 애론 입장에서 이것은 생사가 놓인 처절한 사투지만, 관객 입장에서 이 모습은 다소 희극적이다. 죽음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순간에도 애론은 식욕, 성욕, 명예욕 등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어떤 액션영화보다 스펙터클하고, 어떤 코미디보다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이 이어진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루함. '127시간'은 세상 만물 사이에서 인간이 점한 '보잘것 없는 위치'를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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