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31 09:43:26
◆1979년 창단···가진 것 없던 아이들, ‘음악’을 선물받다
부산 알로이시오초등학교, 알로이시오중학교, 그리고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는 지난 1973년 세워졌다. ‘알로이시오’란 명칭은 학교를 처음 세운 알로이시오 슈왈츠 신부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공부한다. 재학생 대부분은 초·중·고교 12년 과정을 이곳에서 마친다. 워낙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내다보니 학생과 수녀님들은 친부모나 형제지간처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다.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진 건 1979년 3월이었다. 오케스트라 창단 역시 슈왈츠 신부님의 뜻이었다. 창단 당시부터 오케스트라 운영을 맡아오고 있는 김 소피아 수녀님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에게 음악이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환경은 열악했다. 악기 살 돈이 부족해 가장 싼 악기를 끌어모아 겨우 오케스트라 편성을 갖출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작은 시도가 가져온 기적은 놀라웠다. 창단되던 해 10월,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는 제33회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후 수없이 많은 대회의 상을 휩쓸었다.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1991년, 김 소피아 소녀님은 오케스트라 운영을 위한 자선기금 연주회를 열었다. 뚜껑을 열어본 학교 측은 깜짝 놀랐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키다리 아저씨’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 덕분에 단원들은 연주용 관·현악기는 물론, 방음 시설이 갖춰진 연습실까지 얻을 수 있게 됐다.
◆지휘자 정명훈과의 만남···올 2월엔 카네기홀서 공연도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지난 2005년이었다. 그해 오케스트라는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 씨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정 씨와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를 연결해준 건 정명훈 씨의 형 정명근 씨였다.
계기는 1999년 부산에서 열린 뮤지컬 ‘레 미제라블’ 오디션 현장이었다. 당시 공연 기획사 대표를 맡고 있던 정명근 씨는 알로이시오에 다니던 한 응시자 덕분에 오케스트라의 존재를 알게 됐다. 알로이시오 수녀님들은 정명근 씨를 통해 정명훈 씨의 오케스트라 연습실 방문을 거듭 부탁했다.
바쁜 일정으로 짬을 내지 못하던 정명훈 씨는 2005년, 때마침 당시 지휘봉을 잡고 있던 일본 도쿄 오케스트라의 부산 공연 직후 드디어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을 찾았다. 그리곤 단원들의 열정과 실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후 자신의 아들 정민 씨를 지휘자로 보내 오케스트라 연습을 맡겼다.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는 올 2월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미국 뉴욕 한복판에 자리 잡은 공연장 카네기홀은 일류 연주자에게만 무대를 내주기로 유명한 곳. 이 공연 역시 정명훈 씨의 배려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다.
2008년 정명훈 씨는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이뤄진 ‘희망음악회’ 공연을 끝낸 후 김 소피아 수녀님에게 미국 공연을 제안했다. “수업이 없는 방학이면 괜찮겠다”는 수녀님의 대답을 기억해둔 정 씨는 1년 후 정말 약속을 지켰다. 우연찮게 그해 8월 서울시교향악단 관계자가 한 자선음악회에서 알로이시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은 후 미국 공연을 제의했고, 정 씨가 카네기홀 공연을 추진한 것.
오보에를 맡고 있는 조민식 군(고1)은 카네기홀 연주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무대가 텅 비면 어쩌나’, ‘연주를 틀리면 어쩌지?’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 떠올랐죠.” 하지만 11일(현지 시각) 열린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5개 층을 꽉 채운 객석에선 연방 “브라보(bravo, ‘잘한다’·‘신난다’ 따위의 뜻으로 외치는 소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부산의 한 작은 학교에서 꿈을 키워온 단원들이 기적을 이루는 순간이었다.